오늘 하루만 버티면 저도 내일은 쉽니다.
집안행사가 있어 고향에 다니러 갈 참입니다.
어머니 생신과 아버지 기일이 아직 유월 말이지만
그 무렵은 시험철이라 바쁠 것 같아 선수치러 가는 겁니다.
명절 때 말고 고향 가는 길은 언제나 철부지 소년처럼 설렙니다.
유년의 추억을 나눴던 벗들도 잘난 것들은 모두 대처로 나가 있고,
못난 것들은 자살했거나 혹은 혼자 살거나 해서 쉽사리 보기 힘듭니다.
한데도 고향의 논두렁 밭두렁 보며 아스라한 추억을 되새김하는 것으로도 금세 평화로워집니다.
변치않는 동리 앞 둥근 느티나무를 보면 내가 참 탐욕스런 인간이구나, 느낍니다.
간 김에 중풍으로 입원해 계신 할머니(96세)도 뵙고 오려고 합니다.
제가 태어날 때부터 긴 담뱃대에 봉초 말아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을 이야기하던 할머니가 아직 살아 계십니다.
세월은 유수 같아도 우리 할머니를 보면 참으로 느리게 인생이 지나가는 듯합니다.
"열 줄만 쓰고 그만 두려 했던 시를 평생 쓰는 이유를 묻지 말아라.
내가 편지에, 잘못 살았다고 쓰는 시간에도 나무는 건강하고 소낙비는 곧고, 냇물은 즐겁게 흘러간다 "
이기철님의 '느리게 인생이 지나갔다'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저 산 위에 낙락장송처럼 영원히 솔 향기를 뿜으며 꼿꼿하게 살 것 같던 할머니,
벽에 똥칠 않고 자다가 조용히 눈감는 것이 소원이셨는데
말년에 중풍으로 욕창이 생겨 고생하고 있습니다.
소똥에 굴러도 그래도 이승이 나은가는 차마 끝내 물어보지 못하겠습니다.
덕분에 울 어머니가 시집살이 평생 할 팔자가 됐지 뭡니까?
긴 병에 효자 없다 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울고불고 하던 삼촌 고모들도 이제는 무덤덤해져서 일상의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저도 노인이 더는 고생 안하고 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셔도 나무는 건강하고 소낙비는 곧고, 냇물은 즐겁게 흘러가겠죠.
살아남은 것들은 살아야 한다고 아무렇지 않게 또 열심히 살고는 하겠죠.
사는 일이 늘상 그래왔으니 말입니다.
젠장,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져서 좀 어두워졌네요.
이번에 내려갈 땐 쉬엄쉬엄 가렵니다.
그냥 앞만 보고 내달리기엔 가는 봄날의 햇살이 너무 아깝습니다.
진주 촉석루에 들러 논개와 옛날 이야기 나누고 갈까 생각 중입니다.
모두 즐거운 휴일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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