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의자

[스크랩] 못 부친 편지 (詩.이기철)

무아. 2010. 3. 16. 14:40
못 부친 편지


가을이 되면 폐허도 가꿀 줄 알아야 한다
지상에 낙원이 있다고 믿는 자들아
지상엔 낙원이 없다고
오늘도 벌레들은 땅밑에 집을 파고
새들은 하늘로 날아오른다
마흔을 살면서 나는 두 친구와 한 여자를 잃었다
가을은 제 자리에 머물지 않고
마른 버짐같은 꽃들도 헐미같이 져내렸다
폐병3기나 췌장암 말기쯤의 가을이여
썩은 쓰레기여 무너진 논둑이여
네가 가도 남는 것은 끝내
나와 내 상한 애인의 버려진 주름치마와
자주 병이 도지는 남한의 시골길이다
떨어지는 은행잎에 맞아도 어깨가 무너지는 오후엔
들판에 코를 풀고 빈 집의 골방에 들어가
나는 서른 먹은 여자에게 편지를 쓰리라
이 세상은 내일도 이 세상이라고
그러나 사람들은 내일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오늘은 너의 방에 촛불이 한 자루 더 필요할거라고
새벽은 너의 알몸에 찬바람을 뿌려놓고 떠날거라고


詩. 이기철
출처 : 시사랑
글쓴이 : 호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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