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의자

[스크랩] 자화상/서정주

무아. 2010. 3. 16. 14:40
자화상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

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 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케만냥 헐떡 거리며 나는 왔다.
출처 : 무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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