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의자

[스크랩]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무아. 2010. 3. 16. 14:34
      <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 묻질 않어

      그냥, 그래, / 그냥 살어 /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곱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 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 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알 한 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 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도리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버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 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거야


출처 :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글쓴이 : boly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