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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글로 마음을 훔치는 큰 도둑, 이청준

무아. 2010. 3. 15. 00:04

글로 마음을 훔치는 큰 도둑, 이청준

 

이청준의 인생/ 이청준 지음/ 한향란 사진/ 열림원
아름다운 흉터/ 이청준 지음/ 정정엽 그림/ 열림원

 


 


 

[조선일보 김광일 기자] 이청준의 고향에서는 밤길에 마주 오는 길손끼리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마디 해준다고 한다. “소리치면 들릴 만한 거리에 다른 사람이 가고 있소.”한치 앞이 두려운 칠흑 같은 밤을 홀로 걷는 나그네에게는 몇 십, 몇 백 걸음 앞에 동행자가 있다는 믿음만큼 든든한 게 없다. 진짜로 앞서 걷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40여년 동안 “유명한 만큼 대중적 인기는 없었던” 이청준 문학은 깜깜한 현실 속을 걷고 있는 깨어있는 독자들에게는 그러한 든든함의 역할을 해왔다.

 

올해로 등단 40년을 채우는 소설가 이청준이 불혹에 이른 문학 인생을 음미하며 두 권의 산문집을 냈다. 매혹적인 그림과 사진이 곁들여진 이번 책들은 어쩌면 앞으로 쓰게 될 기다란 자서전의 앞토막과 꽁지 부분일 것이다. 유년시절과 고향 이야기가 엮인 ‘아름다운…’이 앞토막이라면, 삶의 여정에서 중요 대목을 짚고 세상 풍물의 표정을 들여다본 ‘이청준…’은 꽁지쯤이다. 예수가 비유로만 말씀하신 시인이었다면 이청준은 자서전마저 일화로만 쓰는 천생 이야기꾼이다. 가까이에서 본 이청준은 능청스럽고 까다로운 신사다. 상체를 약간씩 흔들거나 슬쩍 안경테를 만지면서 자분자분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아는 분은 아시고 모르는 분은 모르시겠지만, 이청준의 글맛은 ‘자분자분’에 들어 있다. 그래도 결국 이청준의 독자들은 가엾다. 그가 글로 마음을 훔치는 큰도둑이기에 독자는 당하면서도 당하는 줄도 모른다. 은은한 글향기에 취하면 도리가 없다. 이청준은 이번 책을 내면서 세상을 용서한다. 그와 오래 사귄 사람들은 그것이 이청준이 세상을 휘어잡는 방책이라는 것을 안다. 책 제목처럼 자신의 인생을 축조한 수십가지 작은 이야기들을 풀어내면서 세상을 밀쳐내듯 품고, 노려보면서 감싸 안는다.

 

가령 대표 장편 ‘당신들의 천국’을 쓰고 평생 ‘소록도 신사’가 된 이청준은 소록도를 격리라고 생각해온 사람들을 용서한다. 그곳에는 스러져 간 사람의 얼굴을 담은 듯 참으로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기 때문이다. 그 소설을 읽고 감동을 받아 평생을 소록도에서 봉사해온 한 여성이 이청준에게 따진다. “선생님이 제 젊음을 빼앗아 갔으니 어떻게 책임지실래요?” 작가에게는 이만저만 큰 부담이 아니었을 것이다. 글 쓰는 이의 두려움이기도 했을 것이다. 약사 출신인 그녀를 몇 번 만나면서 마음의 짐을 덜어보려는 노력도 했으나 영 개운한 것은 아니었다. 그렁저렁 30년이 흐른 어느해 늦가을 문득 소록도를 찾으니 그녀는 에티오피아 난민촌으로 귀환의 기약도 없이 의료봉사를 떠나고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남겼음직한 한마디가 심금을 흔든다.

“이 섬만 해도 제 삶이 꽃 피기에는 너무 호사스러운 땅인 것 같아서요.”

 

독자는 이청준의 소설보다 오히려 이청준의 체험 이야기를 들을 때 그의 진한 글냄새를 맡는다. 본인도 어깨에 힘을 빼고 쓰는 글이어서 편안하고, 독자도 방바닥을 뒹굴며 읽을 수 있다. 다만 눈알이 뻑뻑해지는 감동이 밀려오더라도 그의 책임은 아니다. 소설가가 쓴 실화(實話)일 뿐이니까, 라고만 해둔다. 게다가 이청준은 음란하기까지 하다. 이 무슨 책임 못질 해괴한  소리냐 하겠지만, “문학과 예술은 대개 성과 성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고, 좋은 작품이란 성욕망의 순화와 해방의 과정에서 얻게 된 산물”이라는 게 본인의 설명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읽다 보니 이청준의 글에는 깊은 곳에서 얕은 곳으로 거슬러 오르며 성욕망을 간지럽히는 천연덕스러움이 있다. 엊그제 소개했지만 프랑스의 젊은 소설가 아멜리 노통이 쓴 ‘살인자의 건강법’에서도 주인공으로 나오는 대문호 프레텍스타 타슈(83)가 이렇게 말한다. “작가는 음란해야 하오.”

 

이청준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깨진 유물 한 점을 소개하면서 “깨어진 것이 완형(完形)”이라는 이야기를 꺼내는데 그 또한 시사하는 바가 적지않다. 도굴꾼조차 버리고 간 토기는 사실은 신라 시대에 죽은 사람의 무덤에 함께 넣어준 부장물의 하나로 원래부터 깨서 넣어두었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의 물건을 구별짓는 방법이었다. 깨어진 것이 그릇 원래의 모습이라는 얘기다. 이청준의 글은, 개인의 삶도 인류의 역사도 상처와, 상처의 내력으로 이루어져 간다는, 따지고 보면 상처가 완형일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작고 범박한 이야기 한토막을 꺼내면서 두툼한 철학책 한 권 분량의 이야기를 건네는 솜씨가 이청준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이청준에게 여간해선 들키지 않는 비밀이 있다.

그것은 일화도 아닌 것을 마치 일화처럼 들려준다는 사실이다. 어색한 표현이긴 하지만, 그는 ‘일화스럽게(episodically)’ 말한다. 큰도둑은 그런 글사기(?)로 독자를 사로잡는 것인지 언젠가 한번 물어볼 참이다. 타고난 이야기꾼(born to be a teller)이 못 되는 보통사람은 꿈도 꾸지 못할 솜씨다.

 

둘째 비밀은 얘기의 굽이를 넘어갈 적마다 독자의 관심을 혹독하게 잡아채는 기술이다. 마치 “앞으로 나올 얘기에 비하면 지금까지 당신들이 들은 얘기는 얘기 축에도 못 끼지요”라는 식이다. 지금까지도 재미 있었던 독자는 이 대목에서 얘기꾼의 무릎에 더 바싹 다가앉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예컨대 ‘노인의 침묵’ 같은 글을 보시길).

 

또 하나, 이청준의 에피소드는 하루 동안에 일어나거나 몇 시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짧으면 몇 년, 길면 수삼십년을 훌쩍 건너 뛰는 호흡을 보여준다. 앞서 ‘소록도의 꽃’ 이야기도 그렇고, ‘세상에서 제일 비싼 소철분 이야기’도 십여년을 진행한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주례 선생님 댁으로 인사를 갔던 가난한 이청준 부부는 값싸고 못생긴 소철분을 하나 샀다. 이걸 받아든 주례 선생님이 소철을 잘 키워주겠다고 다짐 말씀을 주셨으나 새내기 부부는 말치레쯤으로 여기고 까마득히 잊는다. 그리고 십여년이 흐른 어느 해 첫 아이를 안고 세배를 갔다가 선생님의 거실에 늠름하게 자라고 있는 소철을 발견하고는 그 앞에 서서 얼어붙어 버린다. 선생님의 말씀을 가벼이 여긴 자신들의 젊은 어리석음이 못내 부끄러웠을 것이고, 벼락같이 엄습한 감사의 마음이 파동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에피소드란 고대 그리스에서 합창대의 노래와 노래 사이에 들어가는 대화를 뜻했다. 이청준의 에피소드도 읽고 나면 그 앞뒤로 거대한 인생의 합창이 들린다. 진짜다. 확인해보시길 권한다.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



[책과 길] ‘아름다운 흉터’…작가를 키운 ‘갯가 개구장이 시절’
 
[국민일보 2004-06-17 16:00]


“여름 햇덩이는 언제나 머리 위에서 뜨겁게 이글거리고,묘지 아래 바다에선 은가루를 뿌린 듯 파도가 반짝였다. 어머니의 밭일은 그 돛배들이 몇 척씩 바다를 가로질러 반대편 산기슭 뒤로 모습을 숨겨가곤 하여도 좀처럼 끝이 나지 않았다. 어머니에겐 그 일곱 마지기 밭이랑이 또 하나의 바다였다.”

 

소설가 이청준(65)씨가 유년시절에 고향인 전남 장흥 바닷가에서 겪었던 손때묻은 이야기 보따리에는 장롱 깊숙이 숨겨 놓은 흑백사진처럼 시간의 풍화작용에 여기저기 찢어지고 바랜,그러나 눈부시게 빛나는 추억들이 담겨 있습니다.

 

“어느 해고 겨울철만 되면 시골집 돌담 너머 보리밭엔 끝없이 긴 이랑을 따라 보리싹들이 파랗게 돋아올라 있었다. 동네 꼬마녀석들의 연 터가 그곳이었다. 그 무렵 아이들에겐 대부분 점심 끼니가 없었다. 연으로 인하여 점심을 찾지 않게 된 것은 오히려 그 서글픈 세태에의 자연스런 순응인 셈이기도 하였다.”

 

어느 봄날 새벽,슬픔도 없이 홍역으로 죽어간 세 살짜리 아우,허기의 얼굴 위로 날아오른 연회색 하늘의 연,개한테 물려 허연 피부막이 들여다보일 정도의 상처를 입었으나 다음날 된장을 발라 신문지로 묶은 손을 흔들며 소풍 가던 기억,어느 날 여객선에서 내려 담임으로 부임해온 수줍던 여선생,전쟁 통에 밤마다 그물질로 이름없이 죽어 떠도는 시신을 건져올리던 김영감,우스꽝스런 모습으로 가짜 약을 팔던 떠돌이 약장수…. 그 중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바로 어제의 일처럼 선명합니다.

 

“말이 곧 노래가 되고 노래가 곧 말이 되는 육자배기 가락같은 웅엉거림 소리는 여인네가 모이는 밭머리 근처엔 더구나 흔했다. 어머니 역시도 밭을 매면서 언제나 이 웅얼거림을 지녔었다. 입으로 소리를 웅얼거리는 것이 아니라,몸 전체로 당신의 소리를 지니고 다니면서 이랑이랑 그것을 뿌리고 다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의 이상한 소리였다.”

 

그는 오늘의 아이들에게 두런두런 말을 건넵니다. “세상일의 모든 현상과 이치를 지식 정보로 전수하고 학습해가는 도회살이와는 달리,교육기반과 기회가 열악한 당시의 벽지 시골살이에선 삼라만상 주위의 일들을 몸으로 직접 부딪치고 깨달아가는 과정 속에 제 삶의 성장이 이루어진다.”

 

산엘 가서는 바위 밑 동굴안에 어떤 짐승이 살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입구에 불을 지피고,학교길을 오가다간 분묘를이장하는 광경을 발견하고 묵은 백골을 구경하기 위해 가파른 언덕길을 쫓아 올라가고,어린 참새 새끼를 꺼내보기 위해 가슴을 떨어가며 처마 밑 새집 구멍마다 손을 쑤셔넣어보던 일 등등. 그가 성장해서 세상의 비밀을 한꺼풀 벗겨내는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갯마을의 장난꾸러기 소년 시절의 호기심과 엿보기가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이청준의 두 손등과 손가락에는 세 개의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있답니다. 어릴 때 키우던 누렁이에게 물린 상처,나무 하러 갔다가 마른 가지끝에 손등이 찍힌 상처.푸나무를 하다가 낫에 난 상처…. 그러나 이제 60년 세월의 저편을 바라보며 그는 바로 그 상처가 있었기에 험난하고 가난했던 세월들을 바닷바람에 일렁이는 청보리처럼 풋풋하게 견뎌낼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나에게 유년시절은 그러나 부끄러운 상처요 흉터였지만 이제 세월이 흘러 부끄럽기만 하던 흉터들은 거꾸로 아름답고 떳떳한 자랑거리로 변해가고 있다.”

(글 이청준,그림 정정엽·열림원)

정철훈기자 chjung@kmib.co.kr

 

 

 

 

이청준 산문집 '손때 묻은 이야기 아름다운 흉터'
 
[한국경제 2004-06-15 17:28


언젠가 이청준의 문우(文友) 나한봉은 이청준의 작품에 대해 "나는 그가 제 재 주로만 소설 쓰는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이 친구는 손만 빌리고 진짜 뒤에서 소설을 쓴 것은 고향과 어머니시더구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한봉의 말처럼 이청준을 우리시대의 이야기꾼으로 키운 것은 그의 유년시절 고향마을과 마을 사람들,그리고 어머니였다.

 

 

이청준의 유년시절 산문집 '아름다운 흉터'
 
[연합뉴스 2004-06-15 16:15]


(서울=연합뉴스) 안인용 기자 = "그 흉터와, 흉터 많은 손꼴은 내 어려웠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요, 그것을 힘들게 참고 이겨낸 떳떳하고 자랑스런 내 삶의 기록일 수 있었다."  작가 이청준(65)의 손에는 흉터 자국이 여러 개 선명하게 남아 있다. 누렁이에게 물린 자국, 마른 가지에 찍힌 상처, 낫질을 하다가 생긴 상처 등이다. 그가 펴낸 '아름다운 흉터'(열림원 刊)에는 작가의 유년시절 이야기가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처럼 잔잔하게 펼쳐진다.

작가는 시곗바늘을 여섯 살이 되던 해로 돌려놓고 동생과 큰형, 아버지의 잇따른 죽음, 큰형이 두고간 책에 적혀 있던 메모를 읽으며 책 속에서 죽은 큰형을 만났던 일에 대해 담담히 서술한다.

 

"형의 삶은 내가 그의 꿈과 소망과 슬픔들을 변함없는 그리움으로 대신 살아드리기로 다짐한 내 삶 속에 누구보다 절실한 여생을 이어가게 된 것이었다. 아니 나는 그 형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사람이란 원래가 육신의 죽음만으로 끝나지 않는 또 다른 생명이 있음을 본 것이다."

 

작가는 전남 장흥의 고향마을 이야기도 풀어놓았다. 작가가 자신의 '삶과 소설의 뿌리'라고 말하는 고향이야기에는 나무냄새가 배어있고 육자배기 가락이 스며있다.

 

"내 글쓰기에는 그렇듯 주위 세상일에 대한 태생적 호기심이 밑자리할 수밖에 없었고, 그 호기심에는 또한 모방욕과 모험심을 함께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산엘 가서는 바위 밑 동굴 안에 어떤 짐승이 살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입구에 불을 지피고, 학교길을 오가다간 분묘를 이장하는 광경을 발견하고 묵은 백골을 구경하기 위해 가파른 언덕길을 쫓아 올라가고..."

 

화가 정정엽이 그린 표지그림과 본문그림은 이청준의 글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책의 중간 중간 두 쪽을 가득 채운 수채화는 다음 장을 넘기려는 손을 자꾸 멈추게 한다. 184쪽. 8천500원.



해거름 녘이 되어도 먹이를 좇는 처마끝의 왕거미가 보이지 않고
골목 담벼락 위의 흰 박꽃이 뜸해지는가 싶으면
이내 서늘한 바람기와 함께 가을이 시작되곤 했다.

 

들국화 핀 이 언덕 송아지 울음소리,
금물결 친 이 강변 쫓기는 참새떼들......

 

그 가을이 깊어지면

동네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서 갓 배운 노래를 합창하며
저녁 연기 피어오르는 마을로 돌아가던 누런 들녁길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나락걷이가 시작되면
공연히 장정 일꾼을 흉내내어 욕심껏 볏단을 지고가다

지친 끝에 잠시 숨결을 쉬고 앉아 바라보던
맞은편 밭둑께의 쑥부쟁이 억새꽃 들국들의 한가롭던 몸짓이 떠오르고,

 

어느덧 가을걷이까지 끝낸 빈 들판에 참쌔떼도 떠나가고
골목골목  가지 끝에 붙은 붉은 까치밥만 외롭게 매달고 선 늙은 감나무 아래
온 동네 집들이 말끔 새 단장을 하고 날 무렵이면

 

비로소 바쁜 일손을 놓고 흰 두루마리 차림에 조상 시향길을 나서던 어른들의
여유로운 산행 정경이 어제련 듯 생생하다.

- 이청준님의 『손때묻은 이야기 아름다운 흉터』中에서 -

출처 :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글쓴이 : bol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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