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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강화도에서 어부로 살아가는 함민복 시인을 찾아서....

무아. 2010. 3. 15. 00:03


함민복 시인을 찾아서 - <레이디경향>

강화도에서 어부로 살아가는 시인 함민복의 일상

“원래 10년 만 살려고 했는데…. 강화도에 대한 서사시는 쓰고 떠나려구요”

서울을 떠나 강화도로 들어간 지 10년. 가난과 자본주의를 소재로 독자들을 울고 웃게 만들던 시인 함민복. 그는 어느새 어부가 다 되어 있었다. 물때에 맞춰 배를 타고 나가서 숭어를 잡아오는 시인 함민복의 얼굴은 건강한 구릿빛으로 물들었다. 함민복이 강화도에서 보낸 재미있는 10년 살이를 들어봤다.



강화도의 시인

“겨울에 낚싯대를 메고 뻘 밭에 나가서 동네 사람들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했대요”

차를 타고 강화도 동막리에 접어들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넓디 넓은 뻘 밭이다. 물때에 따라서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면서 만들어놓은 자연의 보고(寶庫)다. 뻘 밭을 수놓은 촘촘한 구멍 속에는 낙지도 있고, 조개도 있다. 동막리 사람들은 물때에 맞춰 뻘에 나가서 일을 해야 한다. 그물을 던져야 하고, 그물에 걸린 것들을 가져와야 한다. 바다가 나가고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서 일을 나가고 돌아오는 어민들. 달의 시간, 자연의 시간에 맞춰 살아야만 한다. 여의도의 20배도 더 되는 동막리 뻘 밭은 그렇게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시간이 어울려 살아가는 난장이다.

갯벌 체험을 온 것일까? 넓디넓은 동막리 뻘 밭에 듬성듬성 점처럼 보이는 아이들과 어른들이 몸을 구부리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 모든 것이 바쁘게만 돌아가는 도시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평화로워 보인다. 이곳에서 차를 타고 5분 정도 들어가면 큰 교회(도시에서 크다는 의미와는 다르겠지만, 낮게 깔린 집들에 비해 교회는 크게만 보인다)를 만난다. 강화도의 시인 함민복(42)을 만나기 위해서는 교회부터 찾아야 한다. 교회 건물 밑에 그의 보금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자금성, 청와대, 백악관. 지금은 찾아보기도 힘든 양철과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집을 그는 이렇게 부른다. 빨간 양철 지붕의 안채는 자금성, 파란 양철 지붕의 행랑채는 청와대, 하얀 슬레이트 지붕의 화장실은 백악관이다. 묘한 조화와 부조화가 엿보인다.

‘가난과 불우가 그의 생애를 마구 짓밟고 지나가도 그는 몸을 다 내주면서 뒤통수를 긁고 있다’는 소설가 김훈의 이야기처럼.

“제가 살던 곳은 항상 재개발이 됐어요. 저는 계속 주변으로 밀려났고요.(웃음) 서울 창신동, 상계동, 일산을 거쳐서 강화도에 들어왔어요. 고향을 떠나서 살던 곳 중에서 여기가 가장 오래 됐네요. 1996년에 들어왔으니까 10년이 다 돼가요. 이렇게 오래 살 계획은 없었는데…. 살다 보니까 강화도가 저랑 잘 맞는 것 같아요. 집값요? 보증금 없이 월세 10만원이에요.(웃음)”

1996년 대산문화재단에서 창작지원금 5백만원을 받았다. 오래간만에 만져본 목돈이었지만, 이 돈으로는 서울에서 거처를 마련하기 어려웠다. 언젠가 친구들과 마니산 정상에서 본 광활한 뻘 밭 풍경이 생각나 무조건 동막리로 내려온 것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친인척도 없고, 친구도 없는 탓에 외톨이로 지내야 했다. 스스럼없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만한 성격도 아니었고, 동막리 사람들 역시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쉽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동네 이곳저곳을 걸어다니기만 했다. 시간이 나면 뻘 밭에 나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집에는 전화도 없고 가진 거라고는 호출기밖에 없었기에, 호출이 오면 공중전화가 있는 옆 동네까지 40~50분을 걸어가야만 했다. 겨울에는 낚싯대를 가지고 뻘 밭으로 나가기도 했다. 겨울에는 뻘 밭에 나가봐야 잡을 것이 없지만, 강화도에 처음 내려온 함민복이 이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동막리 사람 눈에는 신기하게만 보였을 것이다. 정신이 나간(?) 사람으로 보인 것도 무리가 아니다.

“처음에는 하루에 두 번 물이 빠지고 들어오는 것이 정말 신기했어요. 물이 한 번 빠지면 뻘 밭 길이 보통 4km 정도 돼요. 뻘 밭이라서 걷기가 무척 힘들죠. 뻘 밭만 걸어도 살이 쑥쑥 빠진다니까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뻘 밭을 왔다갔다 하면서 몸무게가 20kg이나 빠졌어요. 아가씨들이 다이어트로 뻘 밭을 걸으면 정말 효과가 있을 걸요.(웃음)”



지금이야 달을 보고 물때를 알아맞힐 정도가 됐고, 계절에 따라 어떤 물고기들이 잡히는지도 안다. 하지만 처음에는 동막리 뻘 밭의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소라를 잡았는데, 손바닥이 자주색으로 물든 것을 보고 죽을 병에 걸린 줄 알았다. 아무리 손을 씻어도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외로웠다. 누구 하나 말 걸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혼자 살다 죽으면 우편배달부가 발견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

“한 1년 지나니까 마을 사람이 처음으로 말을 걸더라구요. 호출이 와서 공중전화에 가서 전화를 걸고 걸어오는데, 버섯 재배를 하던 사람이 어디 갔다 오느냐고 물어보더라구요. 전화 걸고 왔다니까, 심심하면 일 좀 도와달라고 하더라구요. 그때부터 동네 사람들이랑 이야기하기 시작했죠.(웃음)”

동네 사람들은 왜 겨울 뻘 밭에 낚싯대를 메고 나가는지, 왜 할 일 없이 매일 걸어다니기만 하는지, 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물어봤다. 처음에는 시인이라고 말하기 쑥스러워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중에 글 쓰는 시인이라고 털어놨을 때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글을 쓴다고 했을 때, 서예가라고 생각한 것. 함민복에게 와서 좋은 글 하나 써달라는 사람도 많았다. 동네 가겟집과 펜션 주인들은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기도 했다.

‘시인은 술만 먹고 돈 못 버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던 동네 사람들도 이제는 함민복과 함께 배를 타고 나간다.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일이 생기면 동참한다. 이제는 외지인이 아닌 동막리 주민이 된 것. 강화도에 들어올 때는 ‘10년만 살다가 떠나야지’ 마음먹었지만, 그 계획이 연장될 것이라고 한다.

“당분간 강화도를 떠날 생각이 없어요. 얼마 전에 집주인이 바뀌었는데, 집세에 대한 이야기는 없네요. 강화도에 대한 서사시를 써볼 작정입니다. 10년 안에 쓰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요.(웃음)”

지금도 아침이면 마니산, 초지진 등 강화도의 숨은 비경을 찾아간다. 한때는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네 형님을 무조건 따라다니기도 했다. 강화도에서 나오는 물고기의 종류도 조사하고 있다. 강화도에서 삶은 앞으로도 쭈욱 계속될 것이다.

가난의 시인

“마당이 넓은 집에 살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니 조그마한 마당에는 수도와 코펠, 한쪽에는 빈 소주병 몇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작업실로 쓰이는 방에는 데스크톱 컴퓨터가 놓인 조그마한 책상, 1인용 침대, 책꽂이가 전부다. 건넌방에는 축구 경기만을 시청했다는 조그마한 TV 한 대가 방바닥에 있다. 고정 수입이 없는 시인이 사는 모습이다. 함민복의 집을 처음 봤을 때는 가난의 내음 때문에 당혹스러웠다.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여느 작가의 방과는 전혀 다른 느낌. 하지만 당사자는 한 번 쓱 웃고 만다. 그는 가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집이 참 누추하죠!(웃음)”

그는 자신의 가난을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힘들게 산 적은 있지만, 열심히 살아서 힘든 적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독자들은 그의 삶이 녹아 있는 시와 글을 보며 감동받는다. 가난 속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하는 시의 진정성에 감탄하고, 그의 가난한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더 많은 국물을 위해 소금을 풀어 / 라면을 먹는 아침 / 나의 식탁은 풍성하다 / 두루치기 일색인 정치 면의 양념으로 / 팔팔 끓인 스포츠면 찌개에 / … / 신문지를 깔고 라면을 먹는 아침이면 / 매일 상다리가 부러진다’(‘라면을 먹는 아침’에서)

함민복의 유일한 산문집 「눈물은 왜 짠가」(2003)의 갈피갈피에는 그의 지난하던 삶이 그려져 있다. 어머니, 가족, 친척 그리고 그의 인생 여정 속에 마치 퍼즐을 푸는 것처럼 힘들었던 삶이 숨겨져 있다.

“위로 누나 세 분과 형이 두 분 있습니다. 큰형님은 제가 스무 살 때 돌아가셨구요. 제가 막내인데요, 이름은 ‘민첩하게 회복하라’는 뜻입니다. 가족 이야기를 쓰는 데 많이 망설였어요. 쓰면서도 가족의 상처를 팔아먹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많이 됐거든요. 제 생각에 ‘이 정도는 괜찮겠지’ 싶은 부분만 산문집에 썼어요.”



그는 신경림 선생의 고향인 충북 중원군 노은면에서 태어났다. 40리 협곡이 있을 정도로 문명의 이기와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어렸을 때는 마당이 꽤 넓은 집에 살았다.

장날이면 그의 집은 또다른 조그마한 장터가 되었다. 약장수가 와서 장사를 하고, 가설극장이 설치되어 미니 영화관으로 사용될 정도였다. 마당을 사용한 사람들이 주고 간 연필, 과자 등이 어린 함민복에게는 더없이 좋은 선물이었다. 가장 행복하던 시절이다. 당시에는 웃음이 많고 이야기도 곧잘 하던 귀여운 아이였다.

하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가세가 기울면서 가난이 시작됐다. 누구 하나 그에게 어느 학교를 진학해야 하고,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줄 형편이 못 됐다고 한다. 진로는 혼자 결정해야 했다. 실업계 고등학교가 어떤 곳인지 아는 식구가 한 명도 없었을 정도다.

“중학생 때 이소룡의 영화를 보고 무술을 배우고 싶었어요. 무술을 배우려면 서울에 가야 할 것 같아서 등록금이 면제되는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에 들어갔구요. 이때 만난 친구 덕분에 문학에 빠져들었죠.”

당시 함께 기숙사를 쓴 친구는 ‘아는 게 취미’이던 천재 학생이었다. 문학을 알기 위해 라틴어를 공부했고, 그 나이에 토플을 공부한 친구였다. ‘셰익스피어 사전’도 그 친구 덕분에 알았다. 함민복에겐 충격이었다. 그 친구와 함께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문학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학교 방침상 졸업하면 한국전력에 관련된 회사에 무조건 취업을 해야 했다.

그가 택한 곳은 지원자가 별로 없는 월성 원자력발전소였다.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4년간을 버티면서 일했지만, 그는 천성적으로 기계와 어울리지 않았다. 기계만 보면 머리가 아팠고, 우울증까지 생겼다. 사표를 내고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진학했다.

“퇴직금으로 3백50만원을 받았는데, 집에 빚이 있어서 갚아야 했어요. 제 등록금은 형이나 누나가 대주고, 아르바이트해서 생활비를 벌었어요. 제가 한 학기를 더 다녔는데, 마지막 등록금은 고등학생 때 만난 천재 친구가 줬죠.”

형은 살고 있던 전셋집을 월세로 돌려서 등록금을 대주기도 했다. 가족 중 누구 하나 풍족하게 사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은 공부만 하려고 들어갔지만, 현실이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상계동 철거민촌에 들어가서 운동도 했고, 지하철을 붙잡고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시를 쓰려는 사람이 현실을 몰라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남들은 4학기에 마치는 학교를 한 학기를 더 다닐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2학년 1학기에 「세계의 문학」에 ‘성선설’로 등단했다.

졸업한 뒤 출판사에서 1년 정도 일한 것이 직장 생활의 전부다. 그후에는 형님과 함께 농장에서 돼지와 개를 키우기도 했다. 하지만 돈을 번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난과 함께 살아왔다.

“저는 경제적으로 괜찮습니다. 가난하다는 생각은 스스로 만족하지 않을 때 생기거든요. 지금 생활에 만족해요.(웃음) 인터뷰를 잘 안 하는 이유가 저에게 항상 ‘가난’이라는 단어가 따라다니기 때문이에요. 그게 싫어요.”

외로움의 시인

“시를 써야 하는데… 요즘 너무 편해서 그런지 잘 안 써져요”

“남들이 저보고 혼자 사는 게 외롭지 않냐고 많이 물어봐요. 그런데 저는 혼자 살면서 외로움이나 쓸쓸함을 이겨내요. 집에 전화를 놓지 않는 것도 제가 수다스러워지는 것 같아서죠. 친구들이 술을 먹고 새벽에 전화하면 받아줘야 하는데, 그게 저를 옭아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전화기를 두 번이나 부숴버렸어요.”

사람들이 그에게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이 ‘결혼은 안 하느냐?’라면, 그의 대답은 “잘모르겠다”라고. 결혼에 대해서 고민을 안 하는 눈치다. 아니, 결혼에 대해서 어렵다고 느끼고 있는 눈치다. 그는 결혼에 대해서 ‘부족하다’는 말로 비켜간다.

함민복은 쑥스러움을 많이 탄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쉽게 꺼내는 성격도 아니다. 엄마나 누나라는 호칭도 ‘쑥스러워서’ 부르지 못한다고 말할 정도다. 그의 사랑 역시 남들이 보기에는 싱겁기만 하다. 그의 산문집 「눈물은 왜 짠가」에는 사랑하던 여인 H가 나온다. 헤어짐에 눈물을 흘리던 사랑이지만, 그의 이야기에는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 여인은 손도 못 잡아봤어요. 음료수를 주느라고 잠깐 손등을 만져봤는데, 부드럽던데요.(웃음) 결혼은 할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어요.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얼마 전 거의 10년 만에 네번째 시집을 냈다. 그의 시집을 기다리는 독자도 많았지만, 강화도에 온 뒤 시가 잘 안 써졌기 때문이다. “출판사 편집장으로 있는 친구 때문에 시집을 냈다”고 말할 정도로 시집을 내기가 싫었다고 한다.

“계약금을 안 받았으면 안 냈을 거예요.(웃음) 시도 잘 안 써졌고, 왜 시를 써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자연 속에서 살다 보니까 도시에서 살았을 때의 치열함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요즘 다시 시를 써보려고 합니다.”

시를 왜 써야 하는지 몰라 서재에 있던 책을 불사르고 산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시인 함민복. 그의 슬럼프가 이 정도에서 끝났다는 말에 안도감을 느낀다. 그의 시가 주는 감동을 계속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그는 강화도에서 볼 수 있는 물고기에 대한 자료를 조사중이다. 물고기에 대한 시를 쓰고 싶어서다. 강화도에 대한 서사시의 준비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새로운 도전이 궁금하고, 기대된다.

“제 소망이오? 어머님이 좀더 오래 사셨으면 좋겠어요.(웃음)”

그의 웃는 모습이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동막리의 뻘 밭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눈물은 왜 짠가 -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함민복의 시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 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 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 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 //

출처 :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글쓴이 : bol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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