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숲에 들어설 때마다
내 몸과 마음은 거덜 나 있었습니다.
마음은 사막처럼 모래먼지가 날리고
정신은 지칠대로 지쳐있을 때....
숲은 그런 나를 받아주고,
내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게 하여 골짜기 물로 닦아주고
나뭇잎의 숨결로 말려주었습니다.
외로움 끝에 찾아오는 고요함을,
적막 끝에 다가오는 평화로움을,
두려움 끝에 찾아오는 맑은 생각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지친 그대가 이 숲에 오신다면 숲이 나무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나뭇잎을 흔들어 박수를 치며
그대를 받아줄 것입니다.
분주한 마음으로 이 숲에 오셨다가
고요해진 마음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대 혹시 사막에 계시지 않는지요?
한 손에 경전을 들고 일사분란하게
지도자를 따라가면서도 불안함을 떨칠 수 없어
다른 손에 무기를 숨겨둔 채 살고 있진 않는지요?
지켜야 할 수많은 계율이 있고
도처에 원수가 숨어 있으며
경쟁과 싸움을 피할 수 없어서
불안하다면 그대는 사막에 있는 것입니다.
그대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립니다.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그대가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 도종환 시인의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중에서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2008 . 1.21 / 좋은생각 / 저자 도종환
숲이 가르쳐준 사랑과 배려를 통해 더 큰 삶의 의미를 깨닫고 각박한 도시인의 삶에 지친 독자들을 숲으로 초대한다.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의 작가 도종환이 4년 만에 펴내는 신작 산문집『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이 책은 서정시인으로 유명한 작가 도종환이 몸과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들어간 산 속 생활 5년간 써온 글을 모아 엮었다.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는 산 속에서 홀로 지내면서 느낀 자연의 아름다움과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 모든 사물에 대한 관대함과 배려들을 담은 글들로 구성했다.
<저자>
도종환 시인은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충북대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충남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으며, 주성대학 문예창작과 겸임교수를 역임하였다. 이른바 동인지 문단시대로 불리던 1980년대 초 동인지 <분단시대>에 「고두미마을에서」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77년 청산고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교사의 길과 시인의 길을 함께 걸어오던 시인은 1989년 전교조 활동으로 인해 해직되고 투옥되었으며, 1998년 해직 십 년 만에 덕산중학교로 복직하여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지금은 몸이 아파 학교를 그만 두고 보은군 내북면에서 잠시 쉬고 있다.
그의 시에는 찢긴 역사 속의 이웃의 삶을 아프게 공감하며 민족적 양심을 찾아나가는 시인의 의지와 진정한 우리의 정서를 담고자 한다. 각박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맑은 감수성을 보여주어 마음의 등불을 켜고 조용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것을 권한다. 자연을 인간처럼 이해하고, 인간을 자연처럼 이해하는 시인으로 그의 시와 산문에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깊고 맑은 통찰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자연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가를 일깨워주며, 진주가 아름다운 것, 모과가 향기로운 것은 그 상처 때문이라는 것을 고요히 어머니처럼 말하고 있다.
제 8회 신동엽 창작기금, 제 7회 민족예술상, 제 2회 KBS 바른 언어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그동안 펴낸 시집으로 「고두미마을에서」,「접시꽃 당신」,「내가 사랑하는 당신은」,「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당신은 누구십니까」,「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부드러운 직선」,「슬픔의 뿌리」, 등이 있다. 산문집으로는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 배」,「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모과」,「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교육에세이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이 있고, 어른을 위한 동화 「바다유리」가 있다.
<목차>
1부 나는 꽃그늘 아래 혼자 누워 있습니다
지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 꽃그늘 / 외롭지 않아요? / 소풍 / 청안한 삶 / 이 봄에 나는 어디에 있는가 / 여기 시계가 있습니다 / 사람도 저마다 별입니다 / 산도 보고 물도 보는 삶 / 저녁기도 /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 마음으로 하는 일곱 가지 보시 /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
2부 상처 없이 어찌 깊은 사랑이 움틀 수 있을까요
쪽잠 / 우거짓국 / 누가 불렀을까 / 갇힌 새 / 꽃 보러 오세요 / 잘 익은 빛깔 / 집 비운 날 / 겨울 잠/ 배춧국 / 첫 매 화 / 햇살 좋은 날 / 꽃 지는 날 / 나를 만나는 날 / 아름다운 사람 / 소멸의 불꽃 / 동안거 / 산짐승 발자국 / 제일 작은 집
3부 오늘 하루를 아름답게 사세요
나는 지금 고요히 멈추어 있습니다 / 찢어진 장갑 /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 봄의 줄탁 / 주는 농사 / 여름 숲의 보시 / 오늘 하루를 아름답게 사세요 / 쓰레기통 비우기 / 대인과 소인 / 끝날 때도 반가운 만남 / 귤 두 개 / 치통 / 죽 한 그릇
4부 우리가 사랑한 꽃은 다 어디 있는가
바람이 분다, 떠나고 싶다 / 깊이 들여다보기 / 가장 아름다운 색깔 / 조화로운 소리 / 단풍 드는 날 / 고통을 담는 그릇 / 낙엽 이후 / 우리가 사랑한 꽃은 다 어디 있는가 / 생의 한파 / 참나무 장작 / 짐승들에게 말 걸기 / 겨울 산방 / 가까이 있는 꽃 / 남들도 우리처럼 어여삐 여기며 사랑할까요
<책속에서>
폭력이 아니라 사랑에 지고 싶습니다. 권력이 아니라 음악에 지고 싶습니다. 돈이 아니라 눈물나게 아름다운 풍경에 무릎 꿇고 싶습니다. 선연하게 빛나는 초사흘 달에게 항복하고 싶습니다. 침엽수 사이로 뜨는 초사흘 달, 그 옆을 따르는 별의 무리에 섞여 나도 달의 부하, 별의 졸병이 되어 따라다니고 싶습니다. 낫날같이 푸른 달이 시키는 대로 낙엽송 뒤에 가 줄 서고 싶습니다. 거기서 별들을 따라 밤하늘에 달배, 별배를 띄우고 별에 매달려 아주 천천히 떠나는 여행을 따라가고 싶습니다.
사랑에 압도당하고 싶습니다. 눈이 부시는 사랑, 가슴이 벅차서 거기서 정지해버리는 사랑, 그런 사랑에 무릎 꿇고 싶습니다. 진눈깨비 같은 눈물을 뿌리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고 싶습니다. 눈발에 포위당하고 싶습니다. 두 손 두 발을 다 들게 하는 눈 속에 갇히고 싶습니다. 허벅지까지 쌓인 눈 속에 고립되어 있고 싶습니다.
---'지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중에서
산 몇 개 넘어 넓은 구릉 가득한 억새밭 사이에 누워 잠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을 햇살을 덮고 자는 잠이라 비록 여윈잠일지라도 잠깐씩 깰 때마다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와 눈과 머리를 씻어내는 그런 잠을 잘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을바람에 머리칼도 억새처럼 날리고,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면서 무겁던 몸에서 천천히 내가 지니고 있던 무게가 빠져나가는 그런 잠을 자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무릎을 베고 누워 풋잠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드럽고 따스한 무릎을 베고 누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디서부턴가 이야기의 꼬리를 잃어버리고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살에 볼을 대고 잠든 모습을 바라보다가 함께 잠든 사람 위로 나뭇잎 그림자가 일렁이고 고추잠자리가 가만히 머리에 날아와 앉는 가을 한낮의 다디단 쪽잠을 잘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쪽잠' 중에서
사람들이 사막과 같은 도시의 황량함을 피하여 자꾸만 숲과 산과 흙과 나무와 물과 새와 바람소리가 있는 곳으로 오고 싶어 하는 이유는 자연에서 물질적인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막과 같은 도시에서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일사불란한 지휘통제를 따라 한 손에는 경전, 다른 한 손에는 무기를 든 채 잠시도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수많은 계율과 법칙이 있고 도처에 원수가 숨어 있으며 대립과 경쟁과 싸움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늘 긴장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숲에는 원수가 없습니다. 뺏고 빼앗기고 지배하고 짓밟는 싸움이 아니라 서로 하나가 되어 함께 공존하는 일체감과 원융합일의 세계가 있습니다. 원수 대신 내 안의 어둠을 걷어내고 찾아내야 할 신성이 내 속에 있습니다. 내 안에도 있고 나무에게도 있고 병아리를 품고 있는 어미 닭에게도 있는 아트만, 저마다의 하느님이 있습니다.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중에서
우리는 꽃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꽃을 사랑하는 방식이 다분히 우리 위주입니다. 우리가 꽃을 사랑하되 꽃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책상 위가 아니라 꽃이 하루라도 살기에 더 좋은 창가로 옮겨놓아야겠다는 생각은 잘 하지 않습니다. 답답한 공기 속에 가져다 놓고 꽃을 사랑하지 말고 신선한 바람이 더 잘 드나드는 곳에 꽃을 옮겨놓고 사랑하면 안 될까요. 낮에도 형광등을 켜야 일을 할 수 있는 침침한 실내 공간에 화분을 들여놓지 말고 햇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 있을 곳을 마련해놓고 꽃을 사랑하면 안 될까요. 내가 일하는 방 안이 아니라 창밖에 꽃을 내다놓고 거기서 꽃이 새소리도 듣고 후두둑거리며 지나가는 빗줄기에도 젖으며 살게 하면 그건 꽃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일까요. 꽃이 더 싱싱하고 활기차게 살 수 있는 곳이 어느 자리일까를 생각하며 꽃을 사랑한다면 꽃이 다만 주어진 날을 견디며 시들어가지만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사랑한 꽃은 다 어디 있는가' 중에서
내가 먹을 한 그릇의 밥을 내 손으로 지어먹으며 나는 새로운 삶에 눈 뜨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검소하고 간결한 삶이 찾아왔습니다. 내가 먹을 것을 내 손으로 만들어 먹으면서 낭비하지 않고 소박하게 사는 삶의 기쁨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유지되어 오던 자신이 서서히 해체되고 새롭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욕망에 멱살을 잡혀 끌려 다니던 자아가 조금씩 지워지고 작업복 바지 하나로도 편안한 새로운 자아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내 삶의 주체가 바뀌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생의 한파> 중에서
'사람사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연리지 (0) | 2010.03.14 |
---|---|
[스크랩] 돌시인과 어머니 - MBC 휴먼다큐멘터리 사랑 - (0) | 2010.03.14 |
[스크랩] 인생이 바뀌는 대화법.. (0) | 2010.03.14 |
[스크랩] 아버지의 마음 (0) | 2010.03.14 |
[스크랩] 한국 문학의 아름다운 산맥, 박완서를 만나다 (0) | 2010.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