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의자

[스크랩] 공중 외 [송재학] ㅡ 2010 제25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수상작

무아. 2010. 6. 1. 06:29

 

공중

 

 허공이라 생각했다 색이 없다고 믿었다 빈 곳에서 온 곤줄박이 한 마리 창가에 와서 앉았다 할딱거리고 있다 비 젖어 바들바들 떨고 있다 내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허공이란 가끔 연약하구나 회색 깃털과 더불어 뒷목과 배는 갈색이다 검은 부리와 흰 뺨의 영혼이다 공중에서 묻혀온, 공중이 묻혀준 색깔이라 생각했다 깃털의 문양이 보호색이니까 그건 허공의 입김이라 생각했다 박새는 갈필을 따라 날아다니다가 내 창가에서 허공의 날숨을 내고 있다 허공의 색을 찾아보려면 새의 숫사를 셈하면 되겠다 허공은 아마도 추상파의 쥐수염 붓을 가졌을 것이다 일몰 무렵 평사낙안의 발묵이 번진다 짐작하자면 공중의 소리 一家들은 모든 새의 울음에 나누어 서식하고 있을 게다 공중이 텅 비어 보이는 것도 색一家들이 모든 새의 깃털로 바빴기 때문이다 희고 바래긴 했지만 낮달도 渲葉法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공중이 비워지면서 허공을 실천 중이라면, 허공에는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들이 있다 바람결 따라 허공 한 줌 움켜쥐자 내 손바닥을 칠갑하는 색깔들, 오늘 공중의 안감을 보고 만졌다 공중의 문명이란 곤줄박이의 개체 수이다 새점을 배워야겠다

 

 

바다가 번진다

 

 바다가 번진다 흰 갈퀴 뻗대는 볏이 있다면 귀 없고 눈 없고 입 뭉툭하지만 파도의 맨발로 바다가 번진다 내 작은 몸에도 수면이 있어 바다 이야기가 있다 지쳐 있고 다소곳한 걸음만 본다면 바다 쪽은 파도의 뒷꿈치이다 내륙에도 소실점을 세우고픈 바다가 가진 수평의 욕망이라면 파도는 끝없이 내륙을 쓰다듬고 파헤치고 발기는 손발의 뼈 같은 것이겠지만, 내륙의 살을 만지려는 욕망이 더 간절하기에 波高라는 은빛 갈등으로 바다가 번진다 일몰과 일출이 필요한 내 몸에도 수시로 바다가 도착했다 바다가 번질 때마다 파도의 등 푸른 언어가 필요했다 弔詞가 있어야만 했다 뼈가 허옇게 드러난 내륙의 상처를 핥으며 바다가 번진다 기름지느러미 퍼득거리며 물고기가 실어 나른 일만 개의 비늘이 내륙에 도착했다 그만하면 되었다고 짐작한 사람들은 내가 죽은 뒤에도 바다는 수평선이 더 필요하다는 걸 알지 못한다

 

 

나비 날개를 빌린 얼굴

 

나비 날개의 濃淡도 모두 달랐던 날들,

나는 왜 나비 날개의 온도를 닮았던가

짐작해보면 나는 내 의문이지만

내출혈이듯 얇은 가면이기도 했다

피를 흘리면서도 어둠이 편했던,

나는 더 많은 얼굴이 필요했다,

얼굴을 지우면 더 앙상한 얼굴이 도착했다

얼굴의 빈틈으로 내장이 밀려 나오기에

느티나무 그늘을 두텁게 발랐다

나무가 빌려준 나뭇잎은 눈썹뿐이어서

내 얼굴에서 캄캄한 입은 없지만

어떤 얼굴에는 수면을 가진 이목구비가 있다

나비가 미묘한 곳에서 출발해야 한다면

얼굴이 바로 그곳이다

얼굴의 지층을 벗기니 날개였다

애벌레를 지나온 나비 떼,

나비 떼를 거쳐온 얼굴들,

내 얼굴은 불편한 퇴적층이므로

나비 날개는 모두 그곳에서 생겼다

 

 

물의 상자

 

저수지 물결이 늦가을 내내

도돌도돌 껍질을 만들 때가 있다

그게 사과 껍질처럼 벗겨지는지 늦가을 수면은

금방 다른 무늬의 껍질을 오돌도돌 만들고 있다

밤이 되면 가시까지 돋아나는 물껍질도 있다

주머니 속 호두를 만지작거리다가

물껍질 안이 궁금해진다

자꾸 껍질을 일구어내니

물의 상자는 흘러내리고 넘치는 것들로 채워져 있는가 보다

수면의 겉이야 제 수줍음이라 하지만

나도 내 입을 쾅쾅 못질할 때가 있다만

겨울 초입부터 꽁꽁 얼어 딱딱해진 얼음의 외피는 또 무언가

물보다 더 부드럽고 연한 것들을 얼음 속 물갈퀴가 붙들고 있다

날이 풀리기도 전에 얼음이 녹고

저수지 중심에서 도드라진 물껍질의 옹이처럼

둥두릇이 떠오른

죽은 사람의 시선도 물속을 향해 꽂혔다

 

 

 

 화살은 가슴을 꿰뚫고 내 등 뒤까지 화살촉을 내밀었다 그러고도 멈추지 못해 오늬는 오래 부르르 떨었다 마치 돌아온 長子처럼 편안하구나 화살은 쏜살로 달려왔지만 내 몸속에서부터 느리게 파고들었다 생이 끝난다는 절망감 대신 몸에 박힌 화살을 자세히 보았다 평생 화살을 다룬 사람으로 화살 아래 죽는다는 것은 영광이지 않는가 아주 잘 만든 화살이다 철제 촉과 아래 매듭의 균형도 적당하고 무엇보다 뼈로 만든 오늬가 절묘하구나 탄식이 절로 나왔다 직선으로 가는 화살은 없다 자 왈 대저 활과 화살에 법도가 있으니 들어보라 허공에 법도가 있다면 바람의 도가 있다 바람의 틈을 찾아 바람의 길을 깨달은 뒤 시위를 당기는 것이 화살의 법도이다 가끔 공기와 바람이 합쳐진 곳에서 화살은 머뭇거리지만 바람에 화살이 부딪쳤다면 그건 궁사라 할 수 없다 화살은 바람을 상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 바람의 사이에는 틈이 있고 화살을 쏘는 마음이 틈을 먼저 지나갈 수 있는 눈썰미를 가져야 한다 과녁은 빈틈의 끝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빽빽한 공기를 비집고 날아간다 나를 관통한 저 화살은 공기와 공기 사이를 거쳐서 바람을 조금도 상하게 하지 않고 내 살과 뼈 사이를 관통했다 바람의 틈을 지난 것처럼 내 살과 뼈 사이를 가지런히 만졌다 내 육체를 조금도 상하지 않았던 것처럼 화살촉도 깨끗할 것이다 좋은 화살에 좋은 궁사이다 이젠 눈을 감아야겠다

 

 

단풍잎들

 

 다른 꽃들 모두 지고 난 뒤 피는 꽃이야 너도꽃이야 꽃인 듯 아닌 듯 너도꽃이야 네 혓바닥은 그늘 담을 궤짝도 없고 시렁도 아니야 낮달의 손뼉 소리 무시로 들락거렸지만 이젠 서러운 꽃인 게야 바람에 대어보던 푸른 뺨, 바람 재어놓던 온몸 멍들고 파이며 꽃인 거야 땅속 뿌리까지 닿는 친화로 꽃이야 우레가 잎 속의 꽃을 더듬었고 꽃을 떠밀었고 잎들의 이야기를 모았다 솟구치는 물관의 힘이 잎이었다면 묵묵부답 붉은색이 꽃이 아니라면 무얼까 일만 개의 나뭇잎이었지만 일만 개의 너도꽃이지만 너가 아닌 색, 너가 아닌 꽃이란 얄궂은 체온이여 홍목당혜 훌쩍 도망가는 시월 단풍이야

 

 

 

* 2010 제25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 문학사상, 2010. 5. 10.

 

 

 

 

출처 : 시사랑
글쓴이 : 초록여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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