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시 봉정사(鳳停寺)를 찾아서
위치 :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901번지 천등산 자락(대한불교 조계종 16교구)
내 스스로 여유를 찾아 떠나는 발걸음 중엔 호젓이 산사를 찾는 것도 한 방법이 된지 오래다.
불자는 아니지만 그저 내 발걸음 닿는 곳으로 가다 보면 불볕더위 여름도 쉽게 넘기 마련이다.
고향으로 가다보면 늘 눈에 띄던 그 이정표를 향해 달려본다.
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에서 안동시내로 가다 보면 도로 입간판에 봉정사가 갈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하여 11Km 정도 찾아들면 막다른 길에 봉정사 입구가 나오고 그 곳에
주차도 가능하나 매표소(어른 1500원)에서 관람권을 사니 시멘트로 포장된 산길로 들어도 좋단다.
가파르게 200m 가량 오르면 봉정사 일주문이 나오는데, 그 일주문 앞에도 주차공간이 또 나왔다.
대부분 일주문이 나오면 절일을 보는 사람 외 일반 외래인들은 도보로 오르기 마련이었는지라
주차를 했다. 일주문이 곧 세속과 불가의 경계로 여기는지라 주차를 한 후에 걸어서 10여분
올라가니 봉정사 안내소가 나오는데 이곳에도 주차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너르다. 그러하니 결국
세 차례나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절이다. 거기서 봉정사 안내도를 본 후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면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큰 소나무가 눈에 들어오는데 그곳을 거쳐 큰 길로만 무심히 갔더니
경내로 드는 측문인 진여문(眞如門)이 나왔다. 대웅전으로 곧장 오르는 계단을 지나친 것이다.
오르는 길목에서부터 경내까지 사진을 찍어 봤다.
사찰이 가까워지자 길가에는 배롱나무가 그해 더위만큼 활활 불타오르며 곱다.
양반고을 안동인지라 그 길 주변에는 전통가옥이 군데군데 예외없이 흔하다.
그 옛날 대감님의 기침소리가 멎은지 오래라서 일까 ?
세월의 풍랑에 지쳐서 일까 ?
그 옛날 정원수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고사하여 비스듬하게 풍상(風霜)이나 맞을 태세다.
길옆에선 참깨가 한창 익어가고, 들깨는 그 곁에서 우선 잎자랑으로 무성하다.
일주문이다.
일주문 현판엔 천등산 봉정사로 씌어 있다. 직역하자면 '봉황이 머무는 사찰'이라는 해석이 된다.
그래서인지 일주문을 통과할 때 올려다보니 현판은 늙어졌건만 단청은 마치 봉황이 나래를 편 듯 정교하고 곱다.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인 672년 의상대사의 제자 능인스님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서
1972년 극락전을 보수시 발견된 상량문인 기문장처(記文臧處)란 글에서 능인스님에 의해 창건되고
역대 조사 스님들에 의해 중수되었으며 고려조 공민왕12년인 1363년에 옥개(屋蓋=지붕 덮개)부분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나왔다.
특히 국보 15호로 지정된 극락전은 우리나라 현존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며 경내에는 대웅전
(보물 55호), 화엄강당(보물 448호), 고금당(보물 449호), 만세루(유형문화재 325호), 삼층석탑
(유형문화재 182호)최근 발견된 후불벽탱화, 최고의 목조관세움보살 등 많은 보물이 있으며,
영산암은 한국 10대 정원에 선정될 정도로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찰이다.
그러한데 사전 정보가 없어 영산암을 들리지 못해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다. 누군가가 말했다.
한 자락 정도는 남겨둬야 다시 발걸음을 하게되는 묘미도 있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아야 하는 수밖에...
일주문을 지나니 좌우로 숲이 우거져 매미소리가 요란하고
망초꽃은 좌측기슭 배수로의 돌틈사이에서 한여름을 기웃거리는데, 우측 비탈엔
꽃대가 바람에 얄랑거리는데도 잠자리 한 마리가 굳이 그 끝을 붙잡고 오수에 겹다.
이왕 낮잠을 잘 바에야 꽃향기를 맡아가며 잠을 청해보자는 심사인지 속내를 알 수 없다.
그것 뿐 아니다. 이름 모를 버섯, 풀꽃이 군데군데 피었는가 하면 그 언저리로
거미가 놀고 간 실타래 발길 흔적도 희미하게 걸려있어 산길로 오르는 맛이 홀로 쏠쏠하다.
아래 사진은 봉정사 안내소 임시건물이다.
다름아닌 문화재 해설가가 위치해서 안내나 설명이 필요한 분들을 위해 써비스를 하는 곳.
나이가 지긋하신 여성분이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하행길에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질문을 드렸더니 친절하게
답을 주신다. 다름아니고 절 주위에 묘한 모양을 한 벽돌건물의 용도를 물었었다. 아래 그 사진이 나오는데
얼마전 문화재청장이 오셔서 '남대문이 화재로 소실된 이후 고찰의 화재 예방차원에서 쓰레기 소각장을
철저히 만들도록'지시하여 마치 예술품처럼 독특하게 단장을 해 둔 것이란다.
산중 절건에도 이처럼 하나 하나 예방정비를 해가는 것은 여간 다행이 아니다. 보호받을 가치엔 정성을 보태는 게 당연지사.
봉정사 안내소 마당에 있는 감로수. 내가 갔을 땐 용(龍)도 갈증을 느꼈는지 기웃거린다.
경내쪽으로 오르는 곁에 노송이 지팡이를 짚고 서서 반긴다.
마치 우리어머니가 삽짝에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푸근하다.
그러하니 오래된 고목등걸에 이끼가 끼고 담쟁이가 기어오른 모습은 당연한 것이요
그 정도는 마치 손자가 할아버지의 등을 타는 인간사와 별로 다르지 않다.
대웅전으로 곧장 들려면 소나무를 지나면서 바로 좌측으로 올라야 하는데
습관처럼 넓은 길로 향했더니 측문으로 연결되었던 게 아닌가.
노송의 밑자락 담쟁이
그 윗쪽엔 밑둥이 뻥 뚫린 다른 고목이 또 보였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이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의 의미처럼
밑둥이 뻥 뚫려있으니 공(空), 그 묘한 철학적 가치라도 품고 섰다는 걸까 !
나같은 속인은 아무리 자세히 봐도 뚫린 공간으로 나직한 녹색의 여름,
그 풋내음 더위가 들락거는 느낌 밖엔 아무것도...
경외에 있는 화장실 모습
이 구조물이 바로 화재 예방을 위해 새롭게 축조한 쓰레기 소각장 1 모습.
소각장에 기와를 얹은 것은 아마 이곳 뿐이리라. 굴뚝이 많아 무엇이든 잘 탈 듯...
세월이 한참 흐르고나면 이것도 문화재가 될 법 하지 않은가 !
경내로 드는 측문 진여문(眞如門).
불가의 진리(眞理=깨달음)란 문(門)과 같은 것이라서 '터득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되
깨달으면 문이 열리듯 세상의 진리가 보인다'는 그런 의미일까 !
만세루(萬歲樓) 측면 모습 : 이 건물은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서 대웅전 정면에 위치하여
그 밑자락으로 난 돌개단으로 들면 바로 대웅전이 정면으로 보이게 된다.
몇 몇 사람들은 이곳에 걸터앉아 더위를 식히며 은은한 경내도량의 맛을 보고 있었다.
경북 유형문화재 제 325호. 서기 1680년도에 지은 조선시대 목조 건축물.
여느 절간과 약간 다르게 이곳 경내의 건물들은 조밀한 느낌을 받는다. 처마끝과 처마끝 간의 거리가 그리 멀지않다.
대웅전을 바라보면서 좌측에 위치한 화엄강당.
승려들이 공부하는 곳인데 보기드물게 온돌이 놓여져 있단다.
부처를 모신 곳이 아니라서 기둥의 높이를 낮게 건축했다니
거기에도 불가 나름대로 겸손한 격을 담고 있음을 알았다. 보물 제 448호.
위 건물은 봉정사의 중심건물인 대웅전. 현판이 낡아 글씨가 많이 흐릿하다.
조선 초기의 건물로 추정하며, 서기 2000년도에 해체 보수하였단다. 보물 제55호.
무량해회 벽에 후불벽화의 가치를 다룬 보도기사가 포장되어 걸려있길래 찍어봤다.
<2007. 3. 23 매일신문 기사 >
역사속의 오늘-봉정사 후불벽화 국내 最古 확인
경상북도 안동 봉정사 대웅전 후불벽화(불상 뒤 벽체에 그린 불화)가 국내 최고(最古)인 것으로 2000년 확인됐다.
문화재청이 대웅전을 해체ㆍ수리하는 과정에서 ‘1428년(세종 10년)에 彌勒下生圖(미륵하생도)를 그렸다.’는 기록과
‘1435년(세종 17년)에 대웅전을 중창했다.’는 묵서명을 발견함으로써 확인됐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1476년(성종 7년)에
조성된 전남 강진의 무위사 극락전의 후불벽화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번 묵서명의 발견으로 봉정사
대웅전 후불벽화가 50여 년 정도 앞서 그려진 것으로 밝혀졌다.
1997년 1월에 후불탱화 보수 과정에서 처음 발견된 이 벽화는
대웅전 불상 뒤 3겹의 석분을 곱게 바른 흙벽에 직접 그린
가로 3.87m, 세로 3.8m 크기의 대형 그림으로
석가모니가 제자들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가는 붓으로
유려하게 묘사한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이다.
국내 최고(最古)의 후불벽화 전경.
절간에 가면 가끔 실망할 때가 있다. 다름아닌 풍경의 완품이 제대로 걸려있지 않아서다.
풍경은 있으되 물고기가 떨어져나가고 없는 곳이 태반이라 그 고유의 은은한 풍미(風味)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봉정사를 찾은 날은 바람이 부는 둥 마는 둥 하던데
풍경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와서 더운 기운의 푸른 하늘맛을 살짝 맛보게 되었다.
뭣이든 원래대로 갖춰지지 않은 데서 제대로의 가치가 발하지 않음은 분명할 것이다.
무량해회는 승려의 거주공간.
몇 개의 방으로 나누어 부전승과 객승의 방, 종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요사채이다.
절간에는 부부가 가더라도 남녀가 합방을 하지 못하는 게 불문율이다. 그
곁에는 김치독도 여럿 묻는 곳이 있고, 솥단지도 걸어둔 곳이 있다. 식사준비도 그 뒷곁에서 족히 해결하게 되어 있다.
대웅전과 극락전 사이에 석불이 하나 있다.
위 석불은 원래 봉정사에 있던 것이 아니다. 경북 유형문화재 제 44호.
안정사(안동시 월곡면 미질리 소재) 석조여래좌상이다.
1973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그 절이 폐사되어 이곳으로 옮긴 것.
신체에 비해 작은 불두와 나선형 머리카락이 특이하다.
제작연도는 통일신라시대 9세기말 경으로 추정한다. 손은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국보 15호로 지정된 극락전은 우리나라 현존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서기 672년에 창건, 서기 1972년 보수했으니 1350년이 가까워오는 건물이다.
원래는 대장전(大臧殿)이라 불렀으나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 한다.
와관상은 최고라고 여겨지지 않아보여 스님 한 분이 불공을 들이는 중이었음에도 하는 수 없이 조심스레 셧터를 눌렀는데
내부 천정의 모습이 과연 고풍스러웠다. 송구했던 마음이 아직도 남아 목탁소리가 내 귓전에 생생하다.
극락전 앞뜰에 있는 높이 3.18m 3층석탑. 경북 유형문화재 제182호.
탑의 무게로 인해 기단에 금이 간 것을 볼 수 있다. 고려 중엽의 석탑형식.
고금당(古金堂). 극락전에서 바라보면 우측에 위치. 보물 제 449호.
글씨체를 보고 홀로 웃음을 머금었다. 예술적인 필체다. ㅎㅎㅎㅎㅎ
맞배지붕으로 원래 불상을 모시던 부속 전각으로 생각되나 지금은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다.
서기 1969년 해체복원 당시 상량문에 의하면 서기 1616년에 고쳐지은 기록은 있으나 처음 지은 연도는 미상이다.
이 건물 남쪽에 우화루(雨花樓)가 있어서 남쪽 지붕이 이 건물과 연결되고 그 아랫쪽을 부엌으로 사용했었는데
1969년 고금당과 화엄강당을 해체복원하면서 우화루를 철거하였다 한다.
범종각. 범종각 뒤쪽에 큰 은행나무가 있는데 다른 곳처럼 주변을 잘 꾸미지 않아 허술하게 보였다.
누군가에 의해 단정하게 그 주변을 잘 다듬기만 하면 이 절간의 또 다른 고풍스런 명소가 될 듯 싶다.
범종각 쪽에서 바라본 만세루.
대웅전에서 내려다본 무량해회. 그 곁의 김장독, 무쇠솥.
묻어두는 김장독이 자그마치 13개다. 그 갯수가 혹 무슨 의미라도 지녔을까 ? 괜한 생각일까 ?
범종각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소각장 2. 절간 입구쪽의 소각장 1과 모양을 달리했다.
만세루 현판 글씨(천등산 봉정사)
만세루 밑으로 나 있는 돌계단길.
정면으로 빠꼼히 대웅전 문살이 보인다. 원래는 이 길로 와야 경내로 곧장 들게 된다.
범종각 뒤편, 납골당 내려가는 길옆에 피어있는 나리꽃이 연꽃 못지않게 곱다.
2008년도 8월 2일. 토요일. 불볕 더위 때문에 산사를 돌아나오니 윗도리가 흠뻑 젖어버렸다.
이처럼 잠시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 곁으로 가서 곳곳에 귀 기울이며, 무언의 대화도 나눈 후에
다시 차를 몰아 내 고향 영덕으로 발길을 제촉했다.
무심히 지나치면 무(無)일 터인데 스스로 찾은 산사, 뒤끝은 그저 홀가분한 행복감이다.
* 위 글의 각종 기록근거는 경내 건물마다 붙여둔 설명문 등을 토대로 작성되었음.
영산암, 지조암은 들리지 못해 아쉬움을 남기며....
글 & 사진 / 東川 李春雨
블로그 가기 http://blog.daum.net/cwlee0216/1556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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