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무십일홍

[스크랩] 희양산 봉암사(曦陽山 鳳巖寺)

무아. 2010. 3. 17. 10:11
 
 

희양산 봉암사(曦陽山 鳳巖寺) 





 


보물  제169호  봉암사삼층석탑(鳳巖寺三層石塔)  
9세기 헌덕왕(憲德王) 때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석탑(石塔)이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의 석탑은 2층의 기단(基壇) 위에 구성되어 있으나, 
이 탑은 단층(單層)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塔身部)와 상륜부(相輪部)로 구성되어 있다. 
탑의 몸체가 되는 탑신부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의 비례와 균형이 조화(調和)되어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고, 꼭대기의 장식 부분인 상륜부가 온전하게 남아 있어 
유물(遺物)로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높이가 6.31m인 아담한 탑이다. 

봉암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5년(879)에 지증국사가 처음 지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고 이 극락전과  일주문만이 남아있다. 
보통 극락전은 아미타불상을 모신 법당으로 사용되나, 신라 경순왕(재위 927∼935)이 
피난할 때 조상들을 모시고 명복을 비는 건물인 원당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로, 내부에는 ‘어필각’이라고 쓴 현판이 있다. 
또한 일제시대에 지붕 보수가 있은 듯 지붕 끝에 있는 기와에 소화 16년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서까래 모양이나 건물의 짜여진 구조가 특이하며, 특히 법주사 팔상전과 더불어 
현존하는 오래된 목조탑으로 알려져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년중 사월 초파일에만 공식적으로 산문을 개방한다는 봉암사
그중에서도 스님들 용맹정진하시는 禁地 희양산문 태고선원....
 
스님.....성불 하십시오.....()

평소 일반인은 절대 넘을수 없다는 선원 입구

 
 
운판...
예전에는 끼니때에 두드려 소리를 울렸다고 하나, 지금은 예불시간을 알리는 의식용구로 사용되고 있다.
중요한 불교 의식구로 치는 4물(物)의 하나로, 운판은 공중을 날아 다니는 중생을 제도하고, 허공을 헤매며
떠도는 영혼을 천도하기 위하여 청정한 불음(佛音)을 전하는데 쓰인다고 한다.
 



 

보물  제138호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비로, 
최치원의 4산비(四山碑) 중 하나이다. 
지증대사(824∼882)는 17세에 부석사에서 승려가 되었고,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파를 창시하였다. 헌강왕 8년(882)에 입적하자, 
왕은 ‘지증’이란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은 ‘적조’라 하였다. 
거북모양의 비받침은 머리는 용의 형상이고 몸은 거북 모양이며, 
등 위에는 비를 끼워두는 비좌(碑座)를 갖추고 있다. 비몸 위로 올려진 머릿돌에는 
연꽃무늬와 함께 서로 다투듯 얽혀 있는 8마리 용이 장식되어 생동감이 느껴진다. 
비문에는 지증대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자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데, 
통일신라 후기의 문장가인 최치원이 글을 짓고, 당대의 명필인 승려 혜강이 글씨를 썼다. 
글씨는 왕희지체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꾸밈이 없고 우아하다. 
이 비는 통일신라 경애왕 원년(924)에 세웠으며, 조각과 비문의 글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보물  제137호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  
지증대사의 사리를 모신 부도로 봉암사 대웅전 왼쪽에 서 있다. 
지증대사(824∼882)는 이 절을 창건한 승려로, 17세에 승려가 되어 
헌강왕 7년(881)에 왕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봉암사로 돌아와 
이듬해인 882년에 입적하였다. 왕은 ‘지증’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을‘적조’라 하도록 하였다. 이 부도는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基壇部)를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다. 
기단은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평면 모양은 8각이다. 
밑 단에는 각 면마다 사자를 도드라지게 조각하였으며, 
윗단을 괴는 테두리 부분을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 두툼하게 하였다. 
윗단은 각 모서리 마다 구름이 새겨진 기둥조각을 세우고, 
사이 사이에 가릉빈가를 새겨 넣었는데 그 모습이 우아하다. 
가릉빈가는 불교에서의 상상의 새로, 상반신은 사람 모습이며, 
하반신은 새의 모습이다. 가운데받침돌의 각 면에는 여러 형태의 조각을 새겨 넣었는데, 
더욱 정교하고 치밀하다. 윗받침돌은 윗면에 탑신을 괴기 위한 굄대를 두었으며, 
모서리마다 작고 둥근 기둥 조각을 세워 입체감 있는 난간을 표현하였다. 
탑신은 8각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고, 
앞뒤 2면에는 자물쇠와 문고리가 달린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다. 
그 양 옆으로는 불교의 법을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을, 나머지 두 면에는 
보살의 모습을 돋을새김 하였다. 
지붕돌 역시 8각이며, 아래에는 서까래가 두 겹으로 표현되어 겹처마집을 보고 있는 듯하다. 
처마는 살짝 들려 있으며, 낙수면의 각 모서리선은 굵직하고 끝에 꽃장식이 알맞게 돌출되어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연꽃받침 위로 머리장식이 차례로 얹혀 있다. 지붕돌의 일부분이 부서져 있으나 
각 부분의 꾸밈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품격이 느껴진다.
이 부도는 전체적인 비례가 잘 어우러져 있으며, 지붕돌이 조금 넓어 보이기는 하지만 
안정감이 있다. 부도 옆에는 탑비가 나란히 서 있어서 지증 대사의 생애와 행적을 알 수 있으며,
 비문의 기록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헌강왕 9년(883)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봉암사마애보살좌상(鳳巖寺磨崖菩薩坐像) 시도유형문화재  제121호 (문경시)
이 불상은 머리 주위의 바위면을 얕게 파서 불상이 들어 앉을 자리를 만들어 
머리 부분만 돌출시키고 몸체는 가는 선으로 새겼다. 신체에는 속옷에 매어진 
띠매듭이 매우 뚜렷하고, 옷주름은 자연스럽게 밑으로 흘러내렸다. 
왼손은 배 위에 얹었고 오른손은 위로 들어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연꽃잎이 새겨져 있는 대좌(臺座)에 앉아 있는 자세로 무릎이 넓고 높아 안정감이 있다. 

어떤소원이 담겨있는지?

어떤 소원을 담으시는지?

스님~
마애불과 소원비는 중생들을 바라보시며
어떤생각을 하시는지요?
 


 


 

봉암사 결사 60주년 기념대법회 



청담 향곡 성철 스님(왼쪽부터)이 1960년대 북한산에 올랐던 모습. /해인사 백련암 제공
      경북 문경 희양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봉암사(鳳巖寺)는 신라 헌강왕 때 지증대사가 만들었고,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의 중심지였다. 1947년 가을, 청담 성철 자운 보문 우봉 스님 등 20~30대의 수행열기 시퍼런 스님들이 봉암사에 모여 ‘부처님 법대로 살자’며 시작한 봉암사 결사는 당시 일본식 불교의 잔재를 털어내고 전통으로 회귀하자는 일종의 혁명 선언이었다. 소문은 삽시간에 전국의 눈 밝은 스님들 사이에 퍼졌고 향곡 월산 혜안 법전 성수 법웅 보안 보경 지관 스님 등 30여명이 동참했다. 참가대중들이 결의하고 성철 스님이 붓으로 직접 쓴 당시의 공주규약(共住規約)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一. 森嚴(삼엄)한 佛戒(불계·부처님의 계율)와 崇高(숭고)한 祖訓(조훈·조사들의 가르침) 을 勤修力行(근수력행·온 힘을 다해 수행)하야 究竟大果(구경대과·바라는 궁극의 목적) 의 원만(圓滿) 속성(速成)을 期(기)함.” 그뿐 아니라 소작료나 시주에 기대지 않고 하루 2시간 이상 직접 물 긷고, 나무하고, 밭일하고 탁발했다. 비단으로 만들던 가사도 삼베나 면으로 바꿨다. 방 안에서는 늘 면벽좌선하기로 했으며 잡담을 금했다. 모두 18가지에 이르는 규약을 지킬 자신이 없으면 받아주지도 않았다. 법당에서도 부처님과 제자들의 상(像)과 그림 외에는 모두 떼어냈다. 신도들이 스님에게 3배(拜)를 올리는 승보(僧寶)의 전통도 세웠다. 현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이 “도반 스님과 함께 봉암사에 들렀는데 거기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니 그때까지는 전혀 보지 못한 특이한 방식으로 살고 있었다”고 회고할 정도이다. 참가자들은 규칙을 어기면 당장 쫓겨났고, 서로 “밥값 내놓으라”고 멱살잡이를 하면서경쟁적으로 수행했다. 이 결사 참가자 중 성철 스님 등 4명의 종정과 7명의 총무원장이 나왔다. 현 조계종의 종정 법전 스님을 비롯해 전계대화상인 성수 스님, 총무원장 지관 스님도 당시 참가자였다. 봉암사 결사는 그러나 1950년초부터 공비들이 출몰하면서 참가 스님들이 장소를 경남 고성 문수암으로 옮겼다가 6·25가 발발하고 대중들이 흩어지면서 끝나게 된다. 그렇지만 봉암사는 그 이후로도 조계종 수행가풍을 대표하는 사찰 역할을 해왔다. 1968년 고우 법련 스님 등 10여명의 선승이 다시 봉암사에서 결사를 벌였으며 1982년에는 조계종 종립 특별수도원으로 지정됐다.
Tim Janis - Cathedral of The Pines 사찰자료 - 웹 사진 - 자명고 편집 - 자명고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自鳴鼓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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