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의자

[스크랩] 지리산에 관한 명시

무아. 2010. 3. 16. 14:43
지리산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숲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저 대 밑에
저 산 밑에
지금도 흐를 붉은 피

지금도 저 벌판
저 산맥 굽이굽이
가득히 흘러
울부짖는 것이여
깃발이여
타는 눈동자 떠나던 흰옷들의 그 눈부심

한 자루의 녹슨 낫과 울며 껴안던 그 오랜 가난과
돌아오마던 덧없는 약속 남기고
가버린 것들이여
지금도 내 가슴에 울부짖는 것들이여

얼어붙은 겨울 밑
시냇물 흐름처럼 갔고
시냇물 흐름처럼 지금도 살아 돌아와
이렇게 나를 못살게 두드리는 소리여
옛 노래여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숲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아아 지금도 살아서 내 가슴에 굽이친다
지리산이여
지리산이여

-김지하,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에서






형님네 부부의 초상




고향은 형님의 늙은 얼굴
혹은 노동으로 단련된 형수의 단단한 어깨
이마가 서리처럼 하얀 지리산이 나를 낳았고
허리 푸른 섬진강이 나를 키웠다
낮이면 나를 낳은 왕시루봉 골짜기에 올라 솔나무를 하고
저녁이면 무릎에 턱을 괴고 앉아
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
어느 먼 곳을 그리워했지

느린 소들의 잔등 위로 햇빛이 바스라져 내리고
보리밭에 산그늘 덮이면
가슴 속으로 때없이 울던 기적소리
자라서 우리는 누구나 다 한번씩 기차를 탔고
가서 더러는 돌아오지 않고
객지에 뼈를 묻는 친구도 있었지만
경지정리가 끝난 낯선 논둑길을 따라
이쁜 딸애의 손목을 잡고 돌아서는
훤칠한 피아골의 사내도 있었다

고향은 형님의 늙은 얼굴
혹은 노동으로 단련된 형수의 너른 어깨
우리가 떠난 들을 그들이 일구고
모두가 끝난 땅에서 그들은 시작한다
아침노을의 이마에서 빛나던 지리산이
저녁 섬진강의 보랏빛 물결에
잠시 그 고단한 허리를 담글 때까지

-이시영







여름 지리산



불 이는구나 수수밭머리
팔월의 해가 불을 지르고
풀벌레 소리 자욱이 피어나는구나
가슴 깊은 곳 불꽃 하나 살아
살덩이 그늘진 풀꽃으로 피었구나
수수밭 지나 담배밭 건널 때
어디멘가 늙으신 어머니 모습
뛰어 봤자 경상도 넘어 봤자 전라도
불 이는구나 푸른 숲 머리
머언 하늘에
정찰기 한 대 떠간다
생리조차 끊어진 채
눈 깊은 골짜기 달리던 여전사여,
편히 잠드시라.


-김영현, 시집 <겨울바다>에서






지리산



썩혀둔
세상사 지친 애기들
네 넓은 가슴에 묻으렸더니
가없는 산의 무게만
눈빛에 저려오데.

-장세현, 시집 <거리에서 부르는 사랑노래>에서






지리산



누구의 이름으로
불러야 하느냐
때론 침묵으로, 노여움으로
새푸르게 부릅뜬 산
총알 맞은 다리 절뚝이며
부둥켜 울먹이던 산
누구의 이름으로
다시 타올라야 하느냐

-신동원, 시집 <오늘은 슬픈 시를 쓰고 싶다>에서






지리산



들었네, 나는
그해 겨울 바위더미 밑
쓰러져간 죽음을

들었네, 나는
물소리에 흐르는 것들
바람소리에 날리는 것들
물도
바람도 아닌
피와 살
식지않는 생명의
거대한 울부짖음 소리를

보았네, 나는
반야봉에
피아골에
천왕봉에
싸릿불처럼 타오르던
능선 같은 춤

보았네, 나는
빛나는 겨울의 죽음들을
돌아오지 않으나
살아서 나의 피에 흐르는
지리산 빨치들의
찬란했던 반역을
끊나지 않는 피아의 전투를

-채광석, 시집 <친구여 찬비 내리는 초겨울 새벽은 슬프다>에서






피아골



햇살 받고
눈발 부둥켜안은
대숲이 떨고 있다

계곡을 따라 나뭇가지
제 몸 벗고 불 부비며
물길 위 넘나들고

낙엽은 져
끝내 얼음 속
켜켜이 박혀 있다

지는 달 뜨는 해가 함께
안개 속에서 어깨를 걸고

붉은 노을 산마루에 걸려 있고
나무는 제 키를 줄여 산을 넘는다

-김영환, 시집 <지난 날의 꿈이 나를 밀어간다>에서








장터목



지리산 천왕봉 밑
한참 내려가면
거기 전라도 구례사람
경상도 산청사람
허위단심 올라와
서로 물건 바꾸던 장터목 있다
서로 제 고장 소식 전하던 장터목 있다

이렇게 좋았던 것을
우리나라 사람
이렇게 좋았던 것을

거기서 내려다보는 네 고장 내 고장
이렇게 좋았던 것을

-고은, 시집 <내일의 노래>에서


출처 : 겨레사랑산악회(since1992)
글쓴이 : 무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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