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집 투성이 흑백의 자막속을 한 사내가 천천히 걷고 있다 나는 압핀처럼 꽂혀 있답니다 나는 압핀처럼 꽂혀 있답니다 무너질 것이 남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 즐거운가 즐거운가 사람들은 조금씩 빨라진다 속도가 두려움을 만날 때까지 두려움을 만날 때까지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지금부터 나는 길고도 오랜 여행을 떠날 것이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내 생 뒤에도 남아 있을 망가진 꿈들 망가진 꿈들 망가진 꿈들
빈 집
기형도 시 / 백창우 곡 / 백창우 노래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잘 있거라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음 잘있거라 잘있거라 음 잘있거라
희망에 지칠때까지 사실 이번 휴가의 목적은 있다. 그것을 나는 편의상 '희망'이라고 부를 것이다. 희망이란 말 그대로 욕망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가. 나는 모든 것이 권태롭다. 차라리 나는 내가 철저히 파멸하고 망가져 버리는 상태까지 가고 싶었다. 나는 어떤 시에선가 불행하다고 적었다.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고. 도대체 무엇이 더 남았단 말인가. 누군가 내 정신을 들여다보면 경악할 것이다. 사막이나 항무지, 그 가운데 띄엄띄엄 놓여있는 물구덩이, 그렇다. 그 물구덩이는 어디에서 왔을까. 내가 아직 죽음쪽으로 가지 않고 죽은 듯이 살아있는 이유를 그 물구덩이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희망을 위하여 나는 대구행 첫 차표를 끊은 것이다. 두번째 내가 대구에 간 것은 83년 여름(혹은 82년) 쯤이었다. 친구 B가 대구에서 카투사로 복무하고 있었다. 그때는 안양에서 사귀였던 친구 S와 H(이니셜이 우연히도 첫번째 대구 동행자들과 같다)와 함께였다. 밤차 완행으로 도착해 중앙공원 벤치에 누워 잠을 잔 기억이 있다. B를 불러내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미군(美軍) 막사에도 들어갔었던 것 같다. 흑인 병사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이 카지노를 할 때 우리는 둥근 라켓으로 핑포을 했었다. 서울로 오는 길에 입석칸을 떠나 특실 빈자리에 앉았던 기억도 난다. 그때의 대구도 폭염이었다. 그리고 대구는 나에게 대통령을 뽑은 무서운 도시, 시인들만 우글거리는 신비한 도시, 그리고 폭염의 도시로 달려들었다. 이성복, 이하석, 이태수, 장정일, 구광본, 그리고 김춘수, 한때의 이문열, 그리고 작가 석경 고향도 그곳이었다. 버스는 금강 휴게소에 잠시 멎었다. 강가에 붉고 푸른 텐트들과 벗은 사내들이 가득하였다. 담배 한대를 피우고 버스는 대구로 갔다. 비가 왔으면 싶다. 희망은 있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이 도저한 삶과 삶들, 이해할 수 없는 저 사람들은 오래전에 나에겐 부재(不在)했을 것이다. 나에게 지금 희망은 어떤 모습일까? 한때 나는 그것을 문학이라고 생각하였다. 한때라니? 그랬다. 나는 더이상 시에 접근하지 못한다. 나는 그것을 안다. 시는 어쨌든 욕망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지금 욕망이 사라졌다. 그건 성(聖)도 아니다. 추악하고 덧없는 생존이다. 어쨌든 나는 오래도록 기다려 왔던 탈출위에 있다. 나는 부닥칠 것이다. 공허와 권태뿐일 것이다. 지치고 지쳐서 돌아오리라. *이 글은 '1988년 8월 2일 저녁 5시부터 8월 5일 밤 11시까지 3박4일 간의 짧은 여행의 기록'이라는 메모가 적혀있는 노트의 전문이다.
기형도 산문 '짧은 여행의 기록'중에서
대구를 향하여
대구행 고속버스 안이다. 생각보다 차체가 많이 흔들리고 신제품이라는 이 필기구는 말을 잘 안듣는 편이다. 몹시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좌석 붙박이 휴지상자를 열어보니 담뱃재가 가득하였다. 안심하고 담배를 꺼내어 몇 모금 피우다 꺼버렸다. 연기가 너무 많이 났기 때문이다.
버릇인데, 글을 쓰려고 하면 너무 많은 생각들이 떠올라 나는 공포에 질리곤 한다. 한 가지 생각만이 주어진다면 나는 그것에 대해서 아주 분석적이고 통찰력이 가득찬 문장으로 쓸 자신이 있다. 그러나 내 정신은 너무 얇고 힘이 없어 떠오르는 생각들을 허겁지겁 따라가기만 하는 것이다. 아침에 늦잠을 잤다. 오후 2시쯤 여행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최대한 줄이려고 했는데 여벌의 바지, T셔츠 각각 1착과 속옷을 넣고 카메라를 챙기니 벌써 가방이 무거웠다.
책장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며 짧게 절망했다. 결국 Wㆍ페이터의 문예비평서 『르네상스』그리고 장 그르니에의 산문 『까뮈를 추억함』과 『일상적 삶』, 이렇게 세 권을 가방에 넣었다. 터미널에서 반팔 흰색 T셔츠를 샀다. 케네디 스타일의 칼러가 눈을 끌었기 때문이다. 면도기와 치솔 등속도 구했다.
그리고 신문을 산 것이다. 성실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통속적인 미덕인가. 스낵 코너에서 밥을 먹으며 신문을 6개나 읽고 쓰레기통에 넣었다. 대구행 버스는 저녁 5시 25분에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시간이 너무 남아 욕탕에 가서 찬물 속에 한참을 지냈다. 그리고 창가에 앉아 불편하게 왼손으로 노트를 바치고 이 글을 쓴다.
나는 왜 이 노트를 샀나. 내 습관이 여전하다면 이 노트는 여행의 종료와 함께 고의적으로 분실될 것이며 나는 마찬가지로 이번 여행을 잊을 것이었다. 어쨌든 나는 여행을 떠나고 있다. 대구에 가서 무엇을 할지 나는 모른다. 아마도 장정일 소년에게 전화를 걸 것 같다. 안 걸 수도 있다.
사실 이번 휴가의 목적은 있다. 그것을 나는 편의상 '희망'이라고 부를 것이다. 희망이란 말 그대로 욕망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가. 나는 모든 것이 권태롭다.
차라리 나는 내가 철저히 파멸하고 망가져 버리는 상태까지 가고 싶었다. 나는 어떤 시에선가 불행하다고 적었다.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고. 도대체 무엇이 더 남았단 말인가. 누군가 내 정신을 들여다보면 경악할 것이다. 사막이나 항무지, 그 가운데 띄엄띄엄 놓여있는 물구덩이, 그렇다. 그 물구덩이는 어디에서 왔을까. 내가 아직 죽음쪽으로 가지 않고 죽은 듯이 살아있는 이유를 그 물구덩이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희망을 위하여 나는 대구행 첫 차표를 끊은 것이다.
두번째 내가 대구에 간 것은 83년 여름(혹은 82년) 쯤이었다. 친구 B가 대구에서 카투사로 복무하고 있었다. 그때는 안양에서 사귀였던 친구 S와 H(이니셜이 우연히도 첫번째 대구 동행자들과 같다)와 함께였다. 밤차 완행으로 도착해 중앙공원 벤치에 누워 잠을 잔 기억이 있다. B를 불러내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미군(美軍) 막사에도 들어갔었던 것 같다. 흑인 병사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이 카지노를 할 때 우리는 둥근 라켓으로 핑퐁을 했었다. 서울로 오는 길에 입석칸을 떠나 특실 빈자리에 앉았던 기억도 난다.
그때의 대구도 폭염이었다. 그리고 대구는 나에게 대통령을 뽑은 무서운 도시, 시인들만 우글거리는 신비한 도시, 그리고 폭염의 도시로 달려들었다. 이성복, 이하석, 이태수, 장정일, 구광본, 그리고 김춘수, 한때의 이문열, 그리고 작가 석경 고향도 그곳이었다. 버스는 금강 휴게소에 잠시 멎었다. 강가에 붉고 푸른 텐트들과 벗은 사내들이 가득하였다. 담배 한대를 피우고 버스는 대구로 갔다.
비가 왔으면 싶다. 희망은 있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이 도저한 삶과 삶들, 이해할 수 없는 저 사람들은 오래전에 나에겐 부재(不在)했을 것이다. 나에게 지금 희망은 어떤 모습일까? 한때 나는 그것을 문학이라고 생각하였다. 한때라니? 그랬다. 나는 더이상 시에 접근하지 못한다. 나는 그것을 안다.
대구에 도착하였다. 밤 9시 20분. 버스터미널은 환하였다. 예상했던 막막함이 덮치듯 나를 마중하였다. 먼저 내일 떠날 전주행 차편을 수소문해 보았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나는 내일 전주로 떠날 것이다.
장정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집에 있었다. 10시에 대구백화점 앞에서 그를 만났다. 푸른 체크 무늬 와이셔츠를 입은 짧은 머리의 소년. 우리는 가까운 호프로 가서 한 잔하였고 내가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는 줄 그는 금방 눈치챘다. 연전에 원재길이, 그후에 박인홍이, 그리고 달전에는 박기영, 박덕규가 대구에 왔었다고 했다. 나에게 왜 술을 많이 안하느냐고 그는 물었다. 나는 그와 이것저것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은 직업으로 시를 쓰고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고 했다. 열음사에서 포르노 소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니 나도 그것을, 아니 『그것은 나도 모른다』(1천매)가 곧 나올 거라고 했다. 서울서 봤을 때는 말이 없었는데 대구라 그런지 말을 많이 하였고 발랄했다. 나는 그에게 전화할때 중앙이다라고 했다. 그가 「문학정신」에 발표한 「중앙과 나」를 빗댄 것이었다. 그는, 중앙이요? 하다가 웃었다. 누구세요? 중앙이라고요. 나는 말했다. 그는, 기형도형이군요, 했다. 호프집에서 나와 윈저궁(宮)을 본뜬 지하레스토랑에서 장정일 소년과 나는 맥주를 시켰고「파리텍사스」「베티블루」등의 영화 이야기, 세기말 이야기를 했다. 그는 뮤지컬 드라머「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부른「I don't know how to love him」이야기를 했다. 지금까지 해온 섹스방법(편안한)으로는 그를 사랑할 수 없어 절망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그는 했고 요즘 젊은 시인들 이야기를 했다. 그는 솔직히 말해 이윤택, 김영승, 윤성근의 시가 싫다고 했고, 이문재의 초기시는 너무 아름답다고 했으며 그러나 이문재는 더 이상 시를 못 쓸 것 같다며 진심으로 슬퍼했다. 그는 내 시를 좋아한다고 했다.
1시쯤 우리는 그곳을 나왔고, 그는 원재길과 시인들을 재워준 곳이라며 무슨 여관으로 나를 끌고갔고, 방앞에서 안녕히 주무시라고 이야기한 뒤 도망치듯 뛰어나갔다. 왜 대구에 왔느냐고, 휴가때 그 좋은 도시 다 버리고 하필이면 대구에 왔느냐고 그가 물었을 때, 나는 아무 곳이든 서울만 벗어난다면, 떠나고 싶었다고 했다. 전주에는 약속시간을 정하고 가느냐고 그가 물었을 때 나는 절이 그곳에 있다고 말했다.
장정일은 책은 지문 묻을까봐 손을 씻은 뒤 읽으며, 초판만 읽지 재판은 읽지 않으며, 책에는 볼펜자국을 남기지 않으며, 한 번 본 시들은 모두 외우다시피 한다고 내게 이야기했다.
대구는 크고 넓었다. 밝고 우글거렸다. 장정일은 대구는 부산의 절반도 안된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내 고통의 윤곽을 조금 말해 주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만 마시니 기분이 이상하다고 중얼거렸다. 대구에서의 1박은 이렇게 지나갔다.
시는 어쨌든 욕망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지금 욕망이 사라졌다. 그건 성(聖)도 아니다. 추악하고 덧없는 생존이다. 어쨌든 나는 오래도록 기다려 왔던 탈출위에 있다. 나는 부닥칠 것이다. 공허와 권태뿐일 것이다. 지치고 지쳐서 돌아오리라.
광주와의 첫만남
무등(無等)은 날이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검은 산들을 거느리고 회색의 구름 숲 속에 무등은 있었다. 나는 지금 충장로와 중앙로를 가로지르는 금남로 3가와 4가 사이 '충금' 다방 2층에 앉아있다. 광주고속터미널은 내가 본 그 어느 대도시 터미널보다 초라하고 궁핍했으며 무더웠고 지친 모습이었다. 땀이 폭포처럼 옷 사이로 흘러내렸다.
지금은 저녁 6시. 광주에 도착한 지 2시간이 흘렀다. 터미널에서 부산이나 해남 혹은 이리 방면의 차표를 끊으려 예매처를 기웃거렸으나 너무 혼잡하고 더러워서 터미널을 버리고 길을 건너 신문들을 한 뭉치 샀다. 내가 써두고 온 기사가 나와 있었다. 갑자기 욕지기가 치밀었다. 수퍼마켓에 들어가 필름 한 통을 샀다. 어디로 갈 것인가. 보도 블록 위에 주저앉았다. 황지우(黃芝雨)형에게 전화를 넣을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시간은 많다.
망월동 공원 묘지를 찾아갈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 저사람에 물어도 망월동행 차편을 모른다고 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물어물어 25번 버스가 간다고 알 수 있었고 25번 버스를 타기 위해 현대 예식장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이 사람들이 모두 죽음의 공포를 겪었던 사람들일까. 어찌보면 그랬다. 어두웠고 흐미하였다. 거리는 복잡했지만 힘이 없이 늘어져 있었다. 망월동까지 버스는 달렸고 그곳은 외곽지대였다. 버스기사는 나에게 내려서 걸어가라고 했다. 가게집 아낙네는 1시간을 걸어야 한다고 무덤덤하게 이야기했다. 망월동 3거리에 봉고차가 있었다. 공원 묘지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였다. 차가 왔다.
'묘지 가실랍니까?' 그는 시내로 퇴근하는 길이었는데 나 때문에 한 번 더 운행하겠노라 했다.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가게 집에서 산 카스테라와 비비콜을 먹으며 나는 봉고차에 혼자 앉아 묘지로 ?다. 가는 도중 묘지에서 내려오는 한떼의 대학생들을 보았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플래카드를 든 방송대학생들이었고 봉고차는 이윽고 묘역에 도착했다. 나는 가지 말라고 당부하고 제3묘원을 올랐다.
만장같은 격한, 그러나 햇빛에 바삭바삭 마르고 있는 수십개의 붉고 검고 흰 현수막들과 무덤들이 있었다. 나는 꽃 한송이 소주 한 병 없이 무덤 사이를 거닐었다. '여보 당신은 천사였오, 하늘나라에서 만납시다' 무명열사의 묘, 박관현의 묘, 묘비명 사이를 걸으며 나는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묘원은 아무도 없었고 나 혼자였으며 열사(熱沙)였다. 너무 뜨거워 화상처럼 달구어진 내 얼굴 위로 땀이 사납게 흘러 내렸고, 그것들이 내 눈 속에 들어갔다. 나는 눈물을 닦는 사람처럼 자꾸만 눈가의 땀들을 닦아 냈고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마른꽃 다발과 뜨거운 술병, 금이 간 성모(聖母)상들을 넘어 간이 화장실을 들렀다. 변기속에는 죽은 구더기들이 가득 차 있었다.
제3묘원을 나와 기다리고 있던 봉고차에 탔을 때 50대 후반(혹은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낙네가 서너 살 되어 보이는 소녀와 함께 봉고차에 올랐다. 퍼머 머리에 찌든 얼굴, 갈라진 두툼한 입술, 넓적한 코, 촛점이 흐린 눈동자, 검게 탄 피부, 가는 몸매, 흰 반팔 남방, 갈색 면바지, 굽없는 흰 샌들을 신은 촌부였다. "앞에 타세요." 운전사가 말했다. 50대로 보이는 기사가 나를 보며 말했다. "이한열(李漢烈)이 어머니에요." 나는 좌석 앞으로 옮아갔다. 여인이 힘없이 인사를 했다. "묘지 다녀가세요?" 나는 "한열이 선뱁니다. 연세대학교 선배예요." 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학교 보내면 뭘해요. 이렇게 돼 버렸는데." 여인은 말했다. "이따금 이곳에 다녀갑니다." 늙고 지친 얼굴이었다. 퍼머 머리의 절반이 백발이었다. "한열이 누이의 딸이예요." 봉고차는 그녀와 나만을 싣고 달렸다. "시내로 곧장 들어갈랍니다.
오늘은 퇴근하는 길이에요." 기사가 말했다. 3거리에 차가 닿았을 때 서너명의 대학생들로 보이는 청년들이 소리쳤다. "묘지갑시다!" "이런, 난 시내로 퇴근하려 했는데..."기사가 나를 쳐다보았다. "저희가 내리지요. 저들을 태워주세요." 나와 한열이 어머니는 내렸다. 봉고차는 또다시 묘지로 갔다. 우리는 25번을 기다렸다. 내가 가게에 들어가 음료수 캔 세 개를 샀을 때 버스가 왔고 나는 스트로도 받지 못하고 허둥지둥 버스로 올랐다. 나뭇가지처럼 깡마른 여인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것 드세요."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캔을 내밀었다. 고맙다고 했다. 나도 말이 없었고 여인도 침묵이었다. 지치고 피곤한 얼굴, 누군가 건드려도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햇빛에 검게 탄 촌부. 치산동에 산다고 했다.
버스가 서방시장에 섰을 때 한열이 어머니가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시라고. 나는 손녀딸의 손을 한번 잡아 주었다. 그들이 내렸고 버스문이 닫혔다. 갑자기 창 밖에서 한열이 어머니가 난처한 얼굴로 소리쳤다. 버스는 떠나고 있었다. 그와 함께 한 소년이 승강구 부분에서 무엇인가 주워 창 밖으로 던졌다. 흰색 맥고모자를 썼던 한열이 조카의 앙징맞은 고동색 샌들 한 짝이었다.
버스는 달렸고 나는 금남로 입구에서 내렸다. 햇볕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무등은 구름 속에서 솟아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비오듯 땀을 흘리며 걸었다. 어깨에 둘러멘 가방이 대리석처럼 무거웠다. '충금'다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가방을 던졌다. 커튼은 햇빛에 바랜 핏빛이었다. "1년 전이지요. 7월 5일이에요. 3남매중 큰 아들이지요." 한열이 어머니는 한숨을 토하듯, 그러나 힘없이 중얼거렸지만 멋 모르고 캔만 빨아먹는 어린 손녀딸의 손을 힘들여 쥐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다. 우리 어머니의 뒷모습과 너무 흡사했고, 그것은 감상(感傷)도 계시(啓示)도 아니었다.
망월동 공원묘지 제 3묘원은 찌는 듯이 무더웠고 그것은 고의적인 형벌같았다. 나는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없이 묵묵히 묘원의 인상만 자신없이 기억 속에 집어넣었다. 광주의 충장로와 금남로 교차로에 있는 이곳 '충금'다방에서 광주와의 첫 만남을 적는다.
무진(霧津)으로
황지우형은 집에 없었다. 그는 2,3일 전 문득 단식하러 들어간다고 말하고 주인집을 나갔다고 한다.
5일쯤 있다가 돌아오겠다고 했다 한다. 광주의 태양은 샛노란 빛이었다. 송수권(宋秀權)씨에 연락을 넣을까 하다가 생각을 거두고 광주역으로 갔다. 문득 순천이 눈에 들어왔고 김승옥(金承鈺)과 김현 생각이 났다.
열차는 0시에 있었다. 셈을 해보았다. 결론은,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이었고 밤 8시에 광주말 순천행 직행버스에 올랐다. 순천은 나에게 무엇인가. 안개와 병든 지성의 도시, 부패하고 끈끈한 항구, 그리로 가기 위해 나는 광주를 떠난다.
4시간만에 나는 광주를 도망치고 있다. 유령의 도시 광주, 그러나 화산의 도시 광주여 잘 있거라. 소금의 도시 순천을 향해 무작정 나는 떠난다. 망월동 묘역만을 둘러본 것으로 나의 유적지 순례는 끝을 낸 것인가. 금남로의 몇 구역을 걸었던 기억만으로 나는 광주를 기억할 수 있을까. 때묻은 낡은 간판들이 비닐처럼 흘러내리는 상점들을 지나, 조선대의 소금기둥 같은 거대한 석조를 지나, 검푸른 은행나무 가로를 지나, 안경집 유리창에 걸린 저 커다랗고 둥근, 놀란 두 개의 눈동자를 노려보면서, 남자들보다 여인들이 몇 배나 많은 더러운 골목을 비껴가며, 무등의 권태로운 잔등 아래로 외곽을 벗어나는 버스 안에서 돌아본 광주는 어두워지며 밀려드는 는개 속에서 땅속 아득히 꺼져가고 있다.
아무도 몰래 틈입해 한 아낙네를 만나고 밀사(密使)처럼 혹은 무숙자(無宿者)처럼 이 도시에서 도망치고 있다. 산 바로 밑까지 밀고 들어간 짙푸른 논을 지나 이 버스는 순천으로 가고 있다. 나 태어나 한 번도 사진조차 구경 못한 도시 순천으로, 막막한 절망과 음습한 권태가 안개처럼 부두와 상점과 낡은 건물들을 감싸고 있을 도시로 나는 잠시 떠난다.
그러나 아니다. 나는 광주에서 그 이상한 청년을 만난것이다. 어쩌면 전혀 예기치 못했던 역사를 만나고,
그 역사의 허망함에 눈뜨고, 지상을 떠난 청년들이 묘역에 잠들어 있다.
나는 무엇인가. 가증스러운 냉담자인가. 나에게 있어 국토란 무엇인가. 내가 탐닉해온 것은 육체없는 유령의 자유로움이었다. 지금 이곳의 나는 무엇인가. 너 형이상학자, 흙 위에 떠서 걸어다니는 성자여. 어두워진다. 나의 희망은 좀더 넓은 땅을 갖고 싶다. 이 게으른 손들.
순천으로 가는 국도는 울창한 숲이다. 어둠속으로 원추리 꽃들이 지나간다. 먼 산을 둘러싸고 있는 하늘은 구정물처럼, 폭풍을 기다리며 공포에 질린 빛깔이다. 순천에 도착하면 어쩌면 나는 사나운 빗줄기를 만날 것 같다.
밤 8시 50분. 차창에 빗방울 튕기기 시작한다. 소낙비 들이치다. 여행을 떠난 후 순천행 남도 길에서
처음으로 비를 만난다. 예감은 어김없었다.밤 9시 25분. 이 서늘하고 캄캄한 순천행을 오래도록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할 것이다. 비는 그쳤고 밖은 칠흙처럼 어둡다.
마주오는 차들의 헤드라이트들만이 유일하게 움직인다. 운전기사가 이 어둠 속에서 몇 번이나 위험한 추월을 하였다. 어둠 속에서 그의 속력이 나는 조금 두렵다. 멀리 불빛이 몇점 보인다. 순천이다. 나는 내리고 이 차는 여수로 갈 것이다.
물고기들은 순천에서 썩는다
'어서 오십시오. 살기 좋은 순천입니다.'
표지판을 지나 버스는 밤 9시 40분 순천에 멎는다. 택시를 타고 역으로 가면서 운전기사에게 바다를 물어 보았다. 가장 가까운 바다에 5Km, 전망좋은 여천 바다가 15Km이며 이 시간에는 택시 대절 밖에 없다고 한다. 나는 손쉽게 순천바다는 포기하였다. 도시 가득 소금기 섞인 해풍이 군림하고 있다. 예상보다 규모가 크고 번화한 도시였으나 네온사인을 켠 건물들이 거의 없었다. 검고 낮은 콘크리트 건물들이 삐죽삐죽 솟은 가운데 무슨 여관의 간판들만 허공 간간히 빛을 발하고 있어 그로데스크한 느낌을 주었다.
벌써 손끝에 끈끈한 자국이 있다. 역으로 가서 새벽2시 30분 발 부산행 통일호표를 샀다.
이미 자리는 없고 입석으로라도 가야했다. 순천에서의 일박은 의미가 없었다. 주어진 시간은 약 4시간. 그 시간은 순천에 대한 나의 이상한 애정을 충분히 보상할 것이다. 나는 역 부근식당에서 백반을 시켜 먹으며, 다짐을 입 속에서 우물거렸다. 창밖으로는 시장통이다.'해동'다방 2층, 마담과 여급 두엇이 무료하게 TV를 보고있다. 그렇다. 순천은 나에게 음습한 도시다.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가서 내리니 개천이 흐르고 있다. 순천 시내를 길게 가로 지르고 있는 개천 위로 검고 길다란 콘크리트 다리 풍덕교가 놓여있다.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근처 수산물 창고에서 물고기 썩는 냄새들이 풍겨온다. 사내들은 런닝셔츠바람으로 검은 바지를 입고 불량하게 아스팔트 위를 어슬렁거린다. 소금기 가득하다. 하천 밑으로 내려가 흐르는 검은 물을 본다. 멀리 불빛들이 물위에 길게 몸집을 늘이고 공지 천변에는 몇 개의 텐트가 쳐 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무뚝뚝하다. 경관 한 명이 청과물 상점 가판대 위에 앉아 하품을 한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유독 많다. 건물들은 모두 다 숨어 있다.
부산에서
거진 거렁뱅이가 다 되었다. 옷은 남루하고 더러웠으며 육체는 제멋대로였다. 순천에서의 깊은 밤 탑승. 부산까지의 객차는 지저분했다. 땀냄새와 젖은 옷 냄새, 오랫동안 닦지 않은 손발이 부패하는 냄새로 가득했고 새벽 2시 반부터 7시까지 나는 궤짝처럼 객실바닥 한 귀퉁이에 처박혀 헐떡였다. 창밖에는 캄캄한 소음밖에 없었고 하동, 진주, 마산, 삼랑진 등 이름만 낯익은 고장들이 스쳐갔다. 팔과 다리, 허리, 목, 엉덩이들은 조금만 자세를 바꿔도, 조금만 자세를 고정시켜도 비명을 질러댔다. 고개를 숙이고 잠을 여러 번 청했지만 그것도 내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너, 피곤에 지친 탐미주의자여. 이것도 형벌이다, 소리쳤지마 고통은 마찬가지였다. 불면으로 아우성치는 머리 속으로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지나갔다. 부산에 닿았을 때 나는 오래되어 굳은 먼지들을 닦아낸 손수건처럼 더러웠다. 부산. 나는 왜 이곳에 또 왔던가. 너무 많이 온 곳. 활기찬 곳, 이곳에선 사소한 절망을 과시할 수 없다. 이 도시는 탐미적 딜레탕트들을 경멸한다. 힘으로, 건강함으로 들끓는 도시. 나는 이 도시에서 가장 추악한 방랑자의 모습을 하고 해운대로 갔다. 아침 해운대에는 벌써부터 피서객들에 의해 침범당하고 있었다. 하의를 걷어 부치고 해변을 걸었다.
8시의 햇빛은 벌써 뜨거웠고 나처럼 아무런 목적도, 즐거움도, 그리움도 없이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 송정(松亭)의 달맞이꽃을 보러갈 예정이었으나 눈꺼풀이 너무도 무거웠고 비참했다. 택시를 타고 번화가인 충무로를 향했다. 가까운 목욕탕에 들어갔다. 동물처럼 깊은 잠에 떨어지고 싶었다. 그러나 순간의 깜짝깜짝하는 잠만 몇 차례 나를 도와주었고 나는 다시 거리로 나왔다. 나는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이윤택형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했으나 그만두었으며 태종대 바위로 가리라던 계획도 물거품처럼 터졌다. 지갑에 남은 수표 한 장을 환전하여 나는 천천히 서울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결국 부산에도 비는 오지 않았다. 이곳은 레스토랑'황태자'. 나는 지친 거지의 모습이다.
신(神)이 아닌 자의 집
검은 새 흰새 난다. 강옆의 마을, 해는 뉘엿뉘엿 지고 새들은 물위를 걸어다니다 옥수수 밭으로도 날아온다. 작은 배들이 지나고 강물들은 황금빛 태양의 부스러기들을 마음대로 흘리고 있다. 강 옆의 마을, 흰 수건을 쓴 중년 아낙네가 허리쯤 차오르는 갈대밭을 헤치며 가고 있고, 나는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간다. 낙동강이다. 강 건너 마을 뒷산엔 무덤들과 나무들이 섞여있다. 사과나무 잎새들이 잠시 햇살을 묻히고 흘려버린다. 모래톱 부근에 떠 있는 포크레인으로도 새들은 날아간다. 혼자 떨어져 사색에 잠긴 목이 긴 새들도 많다. 먼 들판에서 흰 연기가 솟아 강물 위를 흘러가고 사내들은 내의를 벗고 물속으로 갔다. 산들은 지는 해의 빛 속에서 흰 먼지덩어리처럼 솟아있는데 기차는 달리고 있다. '유천'이라는 간이역을 지난다. 흰 자갈밭, 얕은 강물, 원족 나온 행락객들의 모습이 아름답고 눈물겹다. 산에는 무덤이 너무 많다. 죽은 자들은 국토(國土)에 깊다. 살기 좋은 낙동강변 마을이다. 수면도 아니고, 몽상도, 명상도 아닌 가수(假睡)의 상태가 1시간 이상 흘렀다. 밤 10시, 열차는 이미 대전을 지났다.
나는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일상들을 향해 기차는 전속력으로 달린다. 물 밑에 가라앉아 있던 것들이 다시 너절하게 떠오르리라. 그렇다면 너 지친 탐미주의자여, 희망이 보이던가. 귀로에서 희망을 품고 걷는 자 있었던가? 그것은 관념이다. 따라서 미묘한 흐름이다. 변화다. 스스로 변화하기. 얼마나 통속적인 의지인가. 그러나 통속의 힘에서 출발하지 않는 자기구원이란 없다. 나는 신(神)이 아니다. 차창 밖 국도에 붉은 꼬리등을 켠 화물트럭들이 달린다. 멀리 보이는 작은 불빛 하나하나마다 일생(一生)의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다. 흘러가버린 나날들에게 전하리라. 내 뿌리없는 믿음들이 지금 어느곳에서 떠다니고 있는가를.
영등포 역에 내리다. 밤 11시. 또 다시 움직이는 세계. 낮게 소리 없이 서울에 섞여든다. 축복의 나날들을 내 스스로 피워내기 위하여, 모든 가식과 허위를 버리고, 이 짧은 여행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기억하며, 서울에서 나는 멎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