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이

[스크랩] 부석사 무량수전 - 최순우

무아. 2010. 3. 14. 23:59
* 부석사 무량수전
- 최순우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조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에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량수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지체야말로 석굴암 건축이나 불국사 돌계단의 구조와 함께 우리 건축이 지니는 참 멋, 즉 조상들의 안목과 그 미덕이 어떠하다는 실증을 보여 주는 본보기라 할 수밖에 없다.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어 진다.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 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리 속에 빙빙 도는 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이다.

이 무량수전 앞에서부터 당간지주가 서 있는 절 밖, 그 넓은 터전을 여러층 단으로 닦으면서 그 마루미로 쌓아 놓은 긴 석축들이 각기 다른 각도에서 이뤄진 것은 아마도 먼 안산이 지니는 겹겹한 능선의 각도와 조화시키기 위해 풍수사상에서 계산된 계획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석축들의 짜임새를 바라보고 있으면 신라나 고려 사람들이 지녔던 자연과 건조물의 조화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같고, 그것은 순리의 아름다움이라고 이름짓고 싶다. 크고 작은 자연석을 섞어서 높고 긴 석축을 쌓아올리는 일은 자칫 잔재주에 기울기 마련이지만, 이 부석사 석축들을 돌아보고 있으면 이끼 낀 크고 작은 돌들의 모습이 모두 그 석축 속에서 편안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희한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


이 글은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학고재, 1994년 발행) 에 실려 있는 글이다.


10년 전 타계한 최순우선생의 일생을 사람들은 `박물관인생`이라고 불렀다. 1916년 개성에서 태어나 개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43년 개성 부립 박물관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장장 40 년간 국립중앙박물관에서만 보낸 외길 인생이었다. 그는 10년간 관장을 지내면서 박물관과 한국미술사학의 발전에 적지 않은 공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부분은 우리문화재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밝혀낸 명품해설이었다. 그는 뛰어난 안목과 수려한 문장으로 낱낱 유물에 서린 미적 가치를 드러나게 함으로써 `우리멋의 대변인` `한국미의 파수꾼` 이라는 칭송을 받아 왔다. 이번에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제목으로 간행된 최순우 선집 내지 최순우 명품해설집은 어쩌면 지금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한국의 안내서라고도 할 수 있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우리는 그가 발견하고 그려낸 한국의 아름다움과 한국인의 어진 마음에 저절로 빨려들게 된다. 별 생각 없이 지나치는 자에게는 그 무엇이 있을 리 만무한 백자달항아리를 말하면서 정교한 아름다움 화려한 멋에만 매달리지 말고 `저 너그럽고 원만하고 믿음직스러운 아름다움` 을 배우라고 충고한다.

그 부정형의 원이 그려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이야말로 한국미의 본바탕임을 역설한다. 그러고도 이해 못할 독자들을 위하여 `마치도 잘 생긴 며느리 같다` 는 적절한 비유를 곁들이는 자상한 미의 안내자였다. 모두 다 하는 얘기지만 글은 쉽게 쓰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한다. 쉽고 평범한 글이면서 그 행간 속에 철학적 사고와 미적 성찰이 흥건히 흐르도록 하는 것은 여간한 경지에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순우 선생의 명품해설에는 바로 그런 간명한 명문의 미덕이 서려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을 해설하면서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족히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라며 그 아름다움의 핵심을 적확하게 집어낸다.

그리하여 독자의 공감을 얻어내고 마음을 사로잡은 다음 여유롭게 완상하는 황홀한 미의 순례길로 우리를 이끌어내어 `멀리 떨어져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음` 을 말해주고, 그러고도 안심이 아니되었는지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며 강조에 강조의 뜻이 어린 고백까지 늘어놓는다.

새로 발간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최순우 선생의 탁월한 안목을 새삼 깨달으며 내 가슴속에 사무치는 그 무엇이 있었다. 생각컨대 이 글들은 분명히 내가 언젠가는 읽었던 것이련만 새 글을 읽는 새로움이 살아 있고 분명 20∼30년 전에 쓴 글이겠건만 어떻게 하여 마치 엊그제 탈고한 것 같은 신선함이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한가지 사실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런 것을 일러 고전이라고 말한다는 것. - 동아일보(1994-07-11)

최순우(崔淳雨)
1916년 개성 출생이며, 1935년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개성부립박물관 입사했다. 1945년 서울국립박물관으로 전근 이후 국립박물관 학예관·미술과장·학예연구실장, 문화재위원회 위원·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한국미술사학회 대표를 역임했다.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 취임, 홍익대학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 취득, 1950년부터 서울대·고려대·홍익대·이대 등에서 미술사 강의를 했다. 저자는 1984년 성북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셨다.
 
 

 


 

출처 :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글쓴이 : boly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