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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티벳일기

무아. 2010. 3. 14. 00:41

 

티벳일기
   
 
 티벳일기 1: 중띠엔에서 차마고도를 따라 티벳으로

 


 

후지와라 신야는 <티베트 방랑>(한양출판, 1994)에서 타임 슬립(시간의 흐름을 바꿔 미래나 과거로 건너뛰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타임 슬립이란 동시대에 존재하는 전혀 다른 지층연대를 말한다. 가령 티벳을 여행하다보면 느끼게 되겠지만, 그곳에는 아직도 한국의 1960년대가 곳곳에 존재하고, 우리가 현대화 과정에서 잃어버린 시골의 가치와 정서가 엄연히 실재한다. 그러므로 티벳을 여행한다는 것은 순진한 과거로의 시간여행에 다름아니다.

아침 8시. 쿤밍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구름 속을 헤치고 중띠엔으로 날아간다. 기내방송에서는 계속해서 샹그리라, 샹그리라, 샹그리라가 흘러나온다. 중국에서는 이제 옛 티벳의 땅인 중띠엔을 샹그리라(香格里拉)로 부르고 있다. 1933년 영국의 제임스 힐튼(Hilton James, 1900~1954)이 쓴 장편 <잃어버린 지평선 Lost Horizon>에 보면 히말라야 남쪽 티벳의 산중에 영원히 평화롭고 고요한 신비의 땅이 있다고 했다.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콘웨이)이 찾아간 이 산중의 사원을 '샹그릴라'로 이름붙였다. 이 소설이 널리 알려지면서 샹그릴라는 ‘마음의 이상향’으로 불리게 되었고, 중국은 이 소설의 지명을 빌려 중띠엔 인근을 샹그리라로 명명했다.

 

  거대한 꾸이산 마니차.

 

구불구불 사행천이 휘돌아나가는 녹색 습지와 그 너머로 보이는 뭉툭하고 완만한 산마루. 노란 유채와 푸른 밀밭이 펼쳐진 들판. 계곡의 자욱한 안개 속으로 드러난 빛 바랜 촌락의 집들. 그 풍경 속으로 실랑실랑 가랑비가 흩뿌렸다. 비가 오는 샹그리라 공항. 드디어 나는 티벳 여행의 기점인 중띠엔에 도착했고, 중국이 강제로 점령한 옛 티벳 땅에 첫발을 내딛었다. 평균 해발 3300미터의 고원도시. 과거 티베탄 마을이었던 이 곳은 이제 대부분 한족이 상권을 장악한데다 티베탄을 몰아내고 도시의 노른자위마저 모두 차지한 상태다. 이는 이미 중국이 티벳을 강제점령했을 때 예견된 일이었다.

시내 허름한 식당에서 떠우지안(콩국물)으로 속을 달래고, 씨판(쌀죽)과 바오쯔(만두)로 배를 채운 뒤 본격적인 중띠엔 구경에 나선다. 복원이 한창인 너와집촌을 지나면 야트막한 언덕에 꾸이싼(구산사) 사원이 자리해 있다. 사원은 볼품없고, 대신 언덕에 자리한 거대한 마니차(안에 경전을 넣어 돌리는 금속으로 된 경전통)가 유명한 곳이다. 거대한 마니차는 혼자서는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육중해서 대여섯 명은 힘을 보태야 겨우 돌아간다. 꾸이싼 언덕에서 바라본 중띠엔은 여전히 자욱한 안개로 뒤덮여 있다. 시내를 벗어나면 티벳 사원(곰파)으로는 윈난에서 가장 크다는 쑹첸린 사원을 만날 수 있다. 쑹첸린은 간덴사원을 세운 쫑카파(1357~1419)의 법통을 따르는 겔룩파(티벳 불교의 가장 강력한 종파) 사원으로 '중띠엔의 포탈라'로 통한다. 

 

작은 포탈라라 불리는 쑹첸린 사원의 황금지붕.

 

사실 티벳에서는 사원과 마을이 분리돼 있지 않았다. 사원이 생기면 그 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사원이 마을이고, 마을이 곧 사원인 것이다. 쑹첸린도 다르지 않았다. 어디선가 곱향나무(소나무처럼 생긴 향나무)를 피우고 있는지 사원으로 가는 길은 온통 향 냄새가 진동한다. 자욱한 연기와 안개. 분명하지 않은 시야 속에서 쑹첸린은 점점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며 내 눈을 자극한다. 여러 채의 크고 작은 사원과 수많은 부속채로 이뤄진 쑹첸린은 달라이 라마 5세 때인 1679년에 처음 지어졌다고 하지만, 80년대 이후 복원된 곳이 대부분이어서 그렇게 오래된 옛빛은 찾아볼 수가 없다.

더구나 지붕의 금칠은 최근에 해 놓았는지 너무 깔끔하고, 찬란해서 오히려 거부감이 든다. 그러나 사원을 둘러싼 라마의 집들과 사하촌 풍경은 오래된 흙벽과 회벽이 그대로이고, 지붕조차 잡풀이 성성한 흙지붕이어서 보는 맛이 은근하다. 시내에 인접한 꾸이싼보다 고도가 높아서 사원 지붕에 올라 바라보는 중띠엔 조망도 훨씬 장쾌하고 넉넉하다. 중국이 샹그리라로 부르는 핵심지역 중띠엔의 볼거리는 사실 이 정도에 불과하며, 진정한 샹그리라 풍경은 중띠엔을 벗어난 미지의 고원과 협곡에 존재한다.

 

 

중국에서 티벳으로 가는 육로는 칭장공로(청해-티벳), 신장공로(신장-티벳), 진장공로(윈난-티벳) 등 크게 세 곳이며, 네팔에서는 주로 국경을 넘어가는 우정공로를 통해 티벳으로 들어온다. 중띠엔에서 티벳을 잇는 진장공로의 노선은 중띠엔-더친-옌징-망캄-팍쇼-뽀미-링트리(빠이)-공푸장따-라싸로 이어지며 총연장 2000여 킬로미터에 달한다. 이 길은 중국의 옛 교역로인 차마고도의 옛길을 따라가는 사연 많은 길로써 지금도 티벳에서는 가장 은밀하고 험난한 길로 알려져 있다. 특히 중띠엔에서 망캄을 잇는 214번 국도는 아직도 대부분이 비포장인데다 수시로 산사태가 일어나 가장 어려운 험로로 통한다.

도로는 해발 3000과 4000의 경사를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내리며, 어떤 곳은 100킬로미터를 가도록 마을이 보이지 않고, 어떤 곳은 반나절 이상 5000미터급 산을 넘어야 한다. 사실 여행이라기보다는 탐험이 더 어울리는 길이 바로 214번 국도인 것이다. 중띠엔을 빠져나와 이제 나는 그 길로 들어선다. 차마고도(茶馬古道)를 따라가는 위험하고도 장엄한 길. 옛날(7~8세기) 윈난에서 생산된 차는 오랜 저장을 위해 발효시켜 덩어리로 만든 다음 대발쌈에 싸서 말과 노새에 싣고 리장과 중띠엔, 옌징과 창두, 뽀미, 링트리를 차례로 거쳐 라싸까지 거래되었는데, 주로 티벳과 윈난의 대상이었던 ‘마방’이 이 중계무역을 담당했다. 이렇게 티벳에 온 차는 다시 실핏줄처럼 뻗어 있는 차마고도의 샛길을 따라 네팔과 인도에까지 퍼져나갔다. 

 

쑹첸린 사원 지붕에서 내려다본 샹그리라 핵심지역인 중띠엔 풍경.

 

예부터 이 길은 워낙에 험해서 윈난에서 라싸까지 무사히 간다는 것이 불가능했을 정도이다. 그래서 이들은 파발을 전하듯, 중띠엔에서 더친까지, 더친에서 옌징까지 하는 식으로 중계무역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윈난에서 가져온 차는 옌징에서 소금과 교환하였고, 라싸 인근에서는 말이나 산양, 야크 모피와 거래하였다. 아직도 그 옛날 차마고도를 따라 캐러밴을 했던 마방은 소수가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소금 계곡으로 유명한 옌징이 이들의 마지막 활동 거점 노릇을 하고 있다. 

중띠엔을 벗어나 214번 국도를 따라가는 길. 도로 옆으로 펼쳐진 초원과 완만한 산사락에는 산양과 야크떼가 풀을 뜯는 한가로운 풍경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비에 젖은 푸른 골짜기. 얼마 가지 않아 야크떼가 점령한 광활한 습지도 펼쳐진다. 얼핏 보아서는 초원이고 습지인 이 곳은 꽤나 유명한 나파하이 호수다. 겨울에는 그저 드넓은 초원이었다가 우기인 여름이 되면 호수로 변하는 신비한 호수가 바로 나파하이다. 비가 내리는 양에 따라 호수의 크기와 모양은 그때그때 달라진다. 있다가 사라지고, 없다가 생겨나는 신비한 호수.

 

 나파하이 호수.

 

옛날 중띠엔과 더친을 오가던 마방들은 풀들이 무성한 이 나파하이에서 발품을 쉬며 말들을 풀어 풀을 뜯겼다. 그러니까 말들에게는 이 늪지대가 든든한 목초지였고, 마방들에게는 행복한 휴게소였던 셈이다. 지금 말들은 보이지 않고, 여기저기 늪지대를 점령한 건 검고 누런 야크들과 돼지들 뿐이다. 야크는 풀을 뜯고, 돼지는 늪을 뒤져 달큰한 수초 뿌리를 캐먹는다. 나파하이를 빠져나온 푸른 국도는 이제 본격적으로 험준한 협곡과 산마루를 치닫는다. 멀리 보이는 등성이마다 연분홍 두견화가 흐드러졌다. 한동안 두견화 핀 세상은 지루하도록 계속되었다.

산굽이와 마루를 몇 개 돌고 넘은 도로는 산을 내려와 진사강(金沙江, 양쯔강의 서쪽 원류)을 거슬러 올라간다. 진사강은 티벳 북쪽의 탕구라산에 발원지를 두고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가 메콩강과 샬윈강 상류와 차례로 만나며, 쓰촨에 이르러 양쯔강을 이룬다. 진사강은 엄청난 급류(상류의 경사는 약 2미터마다 4미터씩 낮아진다)에다 농도가 짙은 황토물이다. 숫제 이건 물길이라기보다 황토모래굽이에 더 가깝다. 계곡마다 둥지를 튼 마을에서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고, 이미 보리를 벤 밭에서는 이모작으로 뿌린 친커(쌀보리)가 시퍼렇게 웃자랐다. 친커는 우리의 쌀과 같은 주식으로, 티벳빵인 ‘빠바’의 원료가 된다.

 

   누렇게 익어가는 칭커밭.

 

경사가 심하면 심한대로 밭은 산자락을 헤치지 않고 다랑이진다. 계단식으로 조성된 다랑이밭들. 이런 풍경은 라싸까지 이어진 산중마을에서 가장 흔하게 만나는 풍경이다. 차가 다니는 도로는 아직 멀쩡하지만, 그 옛날 마방과 말들이 걸어갔을 위태로운 산굽이 에움길은 여기저기 산사태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다. 저렇게 아스라한 산비탈과 벼랑끝에 길이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저것이 오래오래 사람이 다닌 길이라면 사람이란 얼마나 무모한 길짐승인가. 길은 누군가 가위로 잘라놓은 듯 뭉청뭉청 잘려 있다. 누군가 꿰매놓은 듯 잘린 길이 감쪽같이 기워진 곳도 있다. 그런 곳은 십중팔구 근처에 마을이 있곤 했다. 옛길과 신작로가 강을 끼고 나란히 이쪽 산비탈과 저쪽 산비탈을 빌려 흘러간다.

 

진사강 상류와 물길을 따라 난 사람의 길.

 

한시간을 달려도 마주오는 차가 한두 대에 불과한 심심하고 외로운 길. 이따금 보이던 계곡의 마을도 점점 드물어진다. 몇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 도착한 산마루 마을 시어라마스. 마을이라고 해봐야 집들은 계곡에 숨어 있고, 길가에는 서너 채의 집이 고작이다. 그나마 차부가 있고, 길가에 구멍가게가 없었다면 모든 차들이 그냥 지나쳤을 황량한 마을. 잠시 쉬어 가고자 내린 곳에서 만난 구멍가게 주인(48)은 오래 전 이주해온 한족이었다. 그의 가게 선반에 올려진 삐루(맥주)며 과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았다. 유통기한을 알 수 없는 물건들. 이렇게 하루종일 뜨내기 손님 몇 명에게 물건을 팔아서 먹고 살기란 불가능하다. 그는 밀과 옥수수 농사를 따로 짓는다고 했지만, 먹고 입는 것이 해결이 안되기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둥주린 사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산중의 펀즈란 마을 전경.

 

고도가 높아지면서 진사강 강줄기는 까마득한 벼랑 아래로 흘러간다. 한동안 그쳤던 비는 다시 흩뿌리고, 급기야 펀즈란 마을에 이르러서는 제법 굵은 빗줄기가 내렸다. 중띠엔에서 펀즈란까지 약 80여 킬로미터. 더친까지는 아직 여기서 100킬로미터 이상을 더 달려야 한다. 펀즈란 마을은 둥주린 사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산마루 마을이다. 아늑하고 적막한 산중마을. 사원은 소박하다. 스님들도 소박하고 인정에 넘친다. 사원에서 만난 루쌍창바 스님(25)은 반갑게 낯선 손님을 맞이했다. 그는 나이가 많지 않음에도 이 사원의 주지스님이었는데, 인상이 제법 넉넉해 보였다. 인상적인 것은 불상을 모신 불단 옆에 달라이 라마 사진을 모셔놓은 것이다. 사실 중국의 사원뿐 아니라 티벳의 사원에서조차 달라이 라마를 모시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다. 공안에 발각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럼에도 둥주린에는 달라이 라마 사진이 버젓이 걸려 있다.

 

 펀즈란에서 만난 노인.

 

- 달라이 라마 사진을 걸어 놓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가?

- 문제가 된다.

- 그런데도 이렇게 걸어놓는가?

- 가끔씩 조사가 나온다. 그 때마다 비밀스런 장소에 감춰 놓곤 한다.

- 이 사진은 어떻게 구했는가?

- 어떻게 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1996년 1월 5일에 사진을 모셨고, 그 때부터 그 분은 우리와 훨씬 가까워졌다.

- 달라이 라마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 알다시피 그 분은 부처의 화신이 아닌가.

- 여기는 언제 왔는가?

- 열몇 살 때 이 사원으로 왔다.

- 그 때 라마가 되었는가?

- 그렇다.

 

 둥주린 사원의 승려들.

 

속세에서의 그의 이름은 아부였다. 그러나 아부로서의 삶은 사원에 들어오는 순간 저만치 던져 버렸다. 사원 안에서는 모래가루에 염료를 섞어 그린 제법 커다란 ‘만달라’를 만날 수 있다. 정교하게 그려진 모래그림이다. 이런 만달라는 밀랍과 모래를 섞어 그리기도 한다. 불단 양쪽 벽에는 밀랍으로 그린 만달라도 볼 수가 있다. 스님은 사원 마당에까지 나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나그네를 배웅했다. 갈길은 멀다. 산이 깊을수록 길은 점점 더 험악해진다. 비는 그쳤다가 흩뿌리기를 반복하더니 바이망 설산(5137미터)을 비껴가는 고개길에서는 돌연 안개비로 돌변했다. 20미터쯤 앞서 가는 차가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안개다. 해발 4000미터를 감안한다면, 이건 안개가 아니라 구름에 가깝다. 그렇다면 지금 내리는 비는 안개비가 아니라 구름의 알갱이인 것이다. 차는 구름 속을 겨우겨우 헤쳐간다.

 

바이망 설산을 비껴가는 고갯마루에서 바라본 풍경.

 

길가에는 목축으로 떠도는 유목민의 임시거주 천막들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그들은 풀이 있는 곳이면 야크와 산양을 몰고 어디든 간다. 그것이 유목민의 오랜 생활방식이다. 안개인지 구름인지가 걷히고, 하늘이 열리면서 왼편으로 바이망 설산 봉우리가 희미하게 나타난다. 해발 4292미터 고갯마루 정상이다. 언덕에는 쵸르텐(돌무덤, 우리의 성황당)이 쌓여 있고, 쵸르텐을 중심으로 타르쵸(경전을 적은 오색 깃발)가 걸려 파르르 바람소리를 낸다. 이 타르쵸가 바람에 날리는 소리를 일러 티벳 사람들은 바람이 경전을 읽고 가는 소리라고 말한다. 보통 타르쵸의 색깔은 우주의 5원소, 즉 파란색-하늘(우주), 노란색-땅, 빨간색-불, 흰색-구름(공기), 초록-바다(물)를 상징한다. 보통 티벳의 언덕이나 고갯마루 등 신성한 곳에는 어디에나 쵸르텐이 세워져 있고 타르쵸가 날린다. 사람들은 이 곳을 지날 때 향을 피우고 하다를 걸며, 기원을 적은 룽다를 날려보내기도 한다.

 

바이망 인근에서 채취한 동충하초.

 

바이망 설산이 가까이 보이는 이 곳의 고갯마루에는 유난히 동충하초 상인들이 많다. 이들은 여러 명씩 몰려다니며 관광객과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에게 접근해 동충하초를 보여주며 살 것을 권유한다. 그들이 팔고 있는 동충하초는 한 주먹에 800위안. 우리 돈으로 10만원쯤 한다. 그들에 따르면 이 곳 바이망 주변이 동충하초가 많이 나는 곳이어서 꽤 많은 사람들이 아예 고갯마루 근처에 유목민처럼 천막을 치고 몇 달씩 동충하초를 채취하러 다닌다고 한다. 한 주먹을 캐는데 몇 달이 걸린다고 하니, 이들의 말 대로라면 그리 비싼 것도 아니다. 바이망 설산을 넘어가면 이제 훼이라이스(비래사)가 지척이고, 훼이라이스를 지나면 더친이 코앞이다. 아침 일찍 중띠엔을 출발해 저녁이 이슥해서야 더친에 도착하였다.

티벳일기 2: 더친에서 쩡궁마을까지

 

 비오는 더친 거리의 마부.

 

중띠엔에서 더친까지의 길은 심한 고도와 굽이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포장구간이 대부분이어서 앞으로 펼쳐질 대책없는 비포장 구간에 비하면 지극히 편한 ‘안전로’나 다름없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도착한 더친(德欽)은 주변의 산자락마다 안개를 친친 감은 채 시큰둥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데, 늙스구레한 사냥꾼 한 명이 활을 어깨에 메고 대로를 활보한다. 등뒤엔 날카롭게 벼린 활들을 여러 촉 꽂은 화살통까지 두른 채,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하고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순간 나는 저걸 찍어야만 해, 하면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보지만, 날이 캄캄해 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체만 찍히고 말았다. 그래도 활에다 화살통까지 맨 사냥꾼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 의외의 소득을 얻은 셈이다. 내가 보고자 한 것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누군가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들이라고, 요즘에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들이라고 저만치 던져버린 것들. 어쩌면 나는 그런 것들을 찾으러 티벳으로 향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더친 인근의 산중마을.

 

약 6만여 명의 인구가 사는 더친은 중띠엔과 마찬가지로 1950년대까지만 해도 티벳 땅이었으나, 중국이 티벳을 강제점령하면서 중국 땅으로 둔갑한 곳이다. 옛날 티벳말로는 ‘아?쓰’라 불렀는데, ‘태평한 극락의 땅’이란 뜻이다. 아마도 소설 속의 샹그릴라가 그리고자 한 세계를 티벳인들이 먼저 그려낸 ‘마음의 이상향’이 이 곳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지금 도심과 마을 어디에도 ‘샹그릴라’다운 면모는 찾아볼 수가 없다. 애당초 그것은 마음 속에 있는 것이므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양에서 말해왔던 유토피아와 동양에서 말해왔던 무릉도원처럼 새롭게 생겨난 샹그릴라도 우리의 관념 속에서만 아름다울 뿐이다.

 

산중마을에서 흔히 만나는 다랑이밭.

 

나의 여정은 이른 아침 다시 시작되었다. 내가 탄 차는 봉고차였는데, 지프차도 넘기 힘들다는 214번 국도를 어떻게 넘어갈지가 걱정이었다. 가파른 협곡이 계속되는 진장공로 주변은 워낙에 농사 지을 땅이 부족해 약간의 공터만 있으면 층층이 뙈기밭을 일구어 다랑이를 이룬다. 마을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산자락은 다랑이밭 차지가 된다. 더친에서 얼마 가지 않아 만나게 되는 훼이라이스 전망대. 어제 오는 길에 만난 훼이라이스와 오늘 만난 훼이라이스는 수십 킬로미터 이상의 거리가 있었지만, 다들 여기도 저기도 훼이라이스라 부른다. 그런데 정작 나는 훼이라이 사원을 만난 적이 없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내가 만난 것이라곤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쵸르텐 뿐이었다.

 

메이리 전망대 마을의 쵸르텐.

 

본래 이 곳은 메이리 설산을 조망하는 최고의 전망대라고 소문이 나 있지만, 지금은 눈앞에 안개에 폭 잠긴 산자락만 감질나게 보일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안보이는 메이리 설산을 향해 절을 하고 향을 피운다. 향로에서 피운 곱향나무 연기는 금세 안개와 뒤섞여, 안개에서 은은한 향기가 난다. 향기가 나는 안개! 메이리 전망대 마을을 벗어나 20킬로미터쯤 달리면, 드디어 지루하고 고달픈 비포장 도로가 시작된다. 차는 덜컹거리고 비틀거리고, 툭하면 만나는 산양떼를 피하느라 곡예를 한다. 이 곳의 양떼들은 차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녀석들은 저쪽에서부터 한 발자국도 비키지 않고 곧장 걸어서 온다. 이쪽에서 거칠게 빵빵거려도 저쪽에선 느긋하게 음메거린다. 야크떼는 그래도 약간의 눈치가 있어서 처음엔 안비켜줄 것처럼 곧장 오다가도 빵빵거리면 귀찮다는 듯 몇 발자국 비켜난다. 문제는 몇 발자국만이다. 완전히 비켜나 길을 내주는 것은 야크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지 꼭 이 녀석들은 몇 발자국만 비킨다. 나머지는 차가 비켜가야 하는데, 그렇게 서로 반반씩 비키자는 게 아무래도 야크의 철학인 것같다.

 

메이리 전망대 마을에서 만난 사내.

 

더친을 지나면서 길이 거슬러온 진사강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대신 란창강(瀾滄江)이 진사강을 대신해 구불구불한 협곡을 접수한다. 비포장길이 시작되면서 산사태의 흔적은 곳곳에 방치돼 있다. 국도가 지나는 산자락의 덩치가 제법 크긴 해도 속은 헐겁기만 해서 도로가 지나간 자리마다 툭하면 토사가 흘러내리고 암석이 굴러떨어진다. 이런 사태는 요즘같은 우기 때는 더욱 심해서 큰 비가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길이 끊기고 앞이 막힌다. 그것이 건설해서는 안될 곳에 건설된 214번 국도의 업보이고, 대가인 것이다. 그 옛날 말을 끌고 지나갔던 마방들이 왜들 그렇게 길에서 죽어야 했는지, 저 산과 계곡만 보아도 짐작이 간다. 이 길은 애당초 구름과 바람에게나 어울리고, 산짐승에게나 통행이 허락된 자연의 길이 아닌가.

 

수시로 사태가 나는 214번 국도.

 

한동안 7~8부 능선을 오르내리던 길은 차츰차츰 고도를 낮춰 란창강에 가까워진다. 급기야 길은 산을 다 내려와 란창강을 바로 옆에 끼고 물길을 따라 흐른다. 그 길에서 만난 한 마부는 내가 출발한 더친에서 장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여기서 더친까지는 100여 킬로미터 남짓이지만, 장보기가 마땅찮은 이런 오지에서는 어쩔 수 없이 거기까지 가야 하는 것이다. 하긴 이런 길을 자전거를 타고 넘어오는 바이커도 있고, 처음부터 오체투지로 넘는 사람도 있다. “아마 오늘은 못 갈 거다. 저 앞에 길이 끊겼다.” 마부는 그 말을 남기고 떠그덕떠그덕 사라졌다. 길이 끊겼다고?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앞서 가던 마부를 지나쳐 봉고차는 먼지를 날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란창강가에서 만난 마부.

 

10여 분쯤 란창강을 따라 올라가자 양쪽 길가에 수많은 차들이 도열해 있었다. 마부의 말이 맞았다. 그 중의 상당수는 돼지를 싣고 온 트럭들이었다. 돼지는 졸고, 꽤액거리고, 꿀꿀거렸으며, 아예 길가에 드러누워 팔자 좋게 낮잠을 즐기는 돼지도 있었다. 길은 언제쯤 뚫리는가? 모른다. 여긴 언제부터 있었는가? 어제 왔다. 그럼 여기서 밤을 보냈단 말인가? 그렇다. 여기가 무슨 마을인가? 쩡궁마을이다. 사람들은 다들 오늘 안가도 상관없다는 듯 느긋했다. 마치 여기가 숙소인 것처럼 한쪽에선 카드를 치거나 마작을 즐겼고, 한 편에선 컵라면을 먹거나 삐루를 마셨다. 한 외국인 부부(이 부부를 드락순쵸에서 다시 만난다)는 길가 통나무에 걸터앉아 주변의 분위기에는 아랑곳없이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다.

 

길이 막힌 쩡궁마을(왼쪽). 다리에 옌러우를 내걸고 있다(오른쪽).

 

졸고, 기다리고, 하품하고. 몇 시간이 될지, 아니면 하루가 될지, 이틀이 될지 알 수 없었다. 며칠 전 내린 폭우로 전방에 토사가 흘러내려 길이 끊겼고, 지금은 그로 인해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만이 확실했다. 여기서 티벳에 가려면 다른 길이 없었다. 다시 길을 돌아나가 칭해성까지 가서 칭장공로를 타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여기서 또 2~3일이 걸리는 일이다. 기다림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마 며칠이 될지도 모른다. 마치 나는 평생을 여기서 기다려 할것만 같았다. 아까 길에서 우연히 만난 마부가 내 앞을 지나쳐 간다. 마부는 때로 말이 차보다 빠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유유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막히지 않고 집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란창강가에 걸터앉아 두 시간째 강물소리만 듣다가 일어났다. 란창강을 가로지르는 출렁다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리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들은 방금 잡은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여 다리에 내걸고 있었다. 냉장고나 냉동고가 없는 이들로서는 빙산에서 흘러왔을 차가운 강물의 수면 위쪽이 일종의 냉장고인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걸어놓은 고기들도 여기저기 늘어져 있었다. 이들은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옌러우’라고 하는데, 이렇게 바람에 말렸다가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쓴다. 저렇게 허공에 매달아 놓아도 아주 썩지는 않는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코담배.

 

차가 막혀 가지 못하는 쩡궁마을은 모두 35가구(150여 명이 사는)가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마을이었는데, 위쪽 산마을에는 13가구가 살고 있었다. 마을 구경이나 하자고 올라간 산마을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개울가에 나앉은 마을 사람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온 나를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이내 경계심을 풀었다. 할머니 한 분이 손에 들고 있던 코담배를 권했다. 황토색 분말이 담긴 작은 담배 쌈지에서 향긋한 담배향이 났다. 뒤늦게 윗집에서 나온 여자 아이는 불청객을 보자 수줍음을 타는지 엄마 등에 매달려 고개를 묻는다. 이따금 고개를 들 때마다 아이는 수줍게 웃었는데, 입 주변과 이가 모두 새카맣다. 군것질을 따로 할 수 없는 이 곳의 아이들은 ‘하이궈’라는 검은 산열매로 주전부리를 대신한다. 하이궈를 한 주먹 다 먹고 나면 저렇게 입 주변과 이가 새카맣게 변하는 것이다. 메이리 전망대 마을에서 나도 이것을 한 움큼 먹어봤는데, 머루와 버찌를 섞은 듯한 기묘한 맛이 났다.

 

 쩡궁마을의 마굿간.

 

이 곳의 집들은 그 구조가 제주도와 흡사했다. 집과 헛간이 따로 분리돼 있었고, 마당에는 한결같이 마굿간과 돼지우리가 있었다. 이 마굿간과 돼지우리는 닭장의 노릇도 겸했는데, 우리 구석에는 나뭇가지를 결어 만든 닭둥우리가 걸려 있었다. 헛간에 걸친 사다리도 우리와 똑같았다. 통나무를 중간중간 도끼로 쪼아내 만든 이 사다리는 오래 전 경주 양동마을에서 본 것과 너무나 흡사했는데, 집집마다 이런 사다리가 두어개쯤은 있었다. 부엌에는 어느 집을 가든 쑤우오차(야크버터차)를 젓는 차통이 있었다. 차통은 큰것일 경우 거의 1미터에 이르렀다. 두어 시간을 산마을에서 보내고 다시 차가 있는 곳으로 내려와보니, 여전히 차들은 갈 생각이 없었다. 아침에 도착해 저녁이 다 되도록 길은 열리지 않았다.

 

   쑤우오차.

 

돌아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2시간을 달려서 다시 메이리 전망대 마을로 왔다. 저녁 8시가 되었는데도 날은 훤하게 밝다. 본래 티벳은 북경과 서너 시간의 시차가 있음에도 북경 시간을 표준시로 삼고 있다. 해서 라싸에서는 9시쯤에야 노을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여기도 별로 다를 게 없어서 8시가 훨씬 넘어서야 날이 어두워졌다. 느긋하게 메이리 설산이나 구경하고자 찾아들어간 카페에서는 한창 쑤우오차를 만드는 중이었다. 차통에 가락을 꽂아 젓고 있는 카페 주인에 따르면 야크 버터를 넣고 이렇게 100번 이상을 저어 주어야 차가 된다고 한다. 처음 맛보

출처 : 쓸쓸히 채워져 있고 따뜻이 비워진 숲
글쓴이 : 들이끼속의 烏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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