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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북한문화재(北韓文化財) . . .

무아. 2010. 3. 14. 00:40

 

北韓文化財

 

平 壤 市

 

을밀대 -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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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 중구역 금수산의 을밀봉에 있는

을밀대는 6세기 중엽 고구려시기에

평양성 내성의 북쪽 장대로 처음 세워진 누정이다.

을밀대란 '윗미르터(윗밀이언덕)'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여기에 '을밀선인'이 자주 하늘에서 내려와 논데서,

또는 '을밀장군(을지문덕 장군의 아들)'이 이 곳을 지켜

싸운데서 온 이름이라는 전설도 있다.

지금의 누정은 1714년에 축대를 보수하면서 고쳐 지은 것이다.

을밀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는

'을밀상춘(을밀대의 봄맞이)'으로 일찍부터

백성들의 사랑을 받아 평양8경의 하나로 일러왔다>

 


현무문 -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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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문은 6세기 중엽 고구려시기에

평양성 북성의 북문으로 처음 세워졌다.

모란봉(최승대가 있는 봉우리)과 을밀봉 사이에 있어

평양성 북방 방위의 요충이었다>

 

 

평양성 - 평양시 중구역 , 평천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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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427년 보다 조건이 유리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고구려의 수도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어

고구려는 지난 시기 수도방위의 교훈과 강력하여진 국력에 기초하여

도시 전부를 성벽으로 둘러막은 새 수도용 평양성을 건설하게 되었다.

평양성은 북쪽에 금수산이 솟고, 동, 서, 남 세면에 대동강과

보통강이 둘러막아 해자를 이룬  유리한 지대에 자리 잡았다.

그 둘레는 약 16km이다. 평양성은 산성과 평지성의 이점을 종합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창안해낸 평산성형식의 새로운 수도성이었다>

 


정릉사 -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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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사 8각9층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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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전

<정릉사는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에 위치하며

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왕릉을 옮겨올 때에

그 앞에 지은 절이다 오래 전에 허물어져

모습을 감추었던 것을 1974년에 발굴하여 찾아냈으며,

그에 기초하여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발굴할 때 여기에서는 18채의 건물터와 10개의 회랑터,

1개의 탑터, 그리고 물도랑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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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明王陵 -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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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관상 : 오이, 재사, 송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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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당(전실 높이 10m, 제실높이 13m)

 

 

대동문 -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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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처음 세워졌다.

947년 중건하였다가 1011년 화재로 파괴된 것을

그 후 다시 세웠다가 병자호란 때 또다시 소실되었다.

지금의 문루는 1635년 재건하고 1852년과 그 이후에

보수를 거듭하여 완성한 것이다>

 

 


開城市

 

왕건왕릉 - 개성시 해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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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왕건왕릉은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하는

송악산의 줄기가 뻗어내려 온 만수산의 나지막한 등성이 위에 자리잡고 있다.

943년에 창건된 것을 1994년에 개건하였다>

 


선죽교 - 개성시 선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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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는 고려시대 후기의, 길이 8.35m, 너비 3.36m인 석조 다리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이 다리는 1216년 이전에 건설되었고

건설 당시의 이름은 선지교였다.

그 후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가 이 다리에서 피살된 때부터

선죽교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난간이 있는 다리와 없는 다리가 있는데

난간이 있는 다리가 선죽교이다.

이 난간은 1780년 정몽주의 후손들이

사람이 다니지 못 하도록 설치한 것이고

난간이 없는 다리는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그 곁에 새로 놓은 것이다.

선죽교 옆에는 "선죽교"라고 쓴 비석이 있다. 

비문은 당대의 명필 석봉 한호의 글씨로 전한다>

 

 

숭양서원 - 개성시 선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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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양서원은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1573년의 조선시대 건물이다.

고려의 유학자였던 포은 정몽주가 살던 집자리에 고려시대 말에

처음 세우고 조선시대 1573년에 고쳐지어 문충당이라 부르다가

1575년에 사액을 받아 숭양서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숭양서원에서는 정몽주 외

16세기의 철학가인 화담 서경덕과 17세기의 학자이자

문학가인 잠곡 김육을 비롯한  유학자들을 추모하여 제사하였다.

 


범사정 - 개성시 박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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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정은 개성시 박연리에 있는

1700년에 세운 조선시기 건물로

우리나라 3대 명폭의 하나인 박연폭포를 옆에 끼고

대흥산성 북문으로 오르는 언덕길 중턱에 있는 정자이다.

'중경지'에는 1700년에 이 건물을 세우고

옛 이름대로 현판을 달았다고 쓰여 있다>

 

 

박연폭포 - 개성시 박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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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시 중심으로부터 26km 산성리의 천마산과

성거산에 끼어 계곡에 있고 높이는 35m이다.

폭포위에 박연이라고 불리는 직경 8m의 아름다운 연못이 있고

고모담이라고 불리우는 직경 40m의 용추의 물가에,

큰 '용암'이 수상에 머리를 내밀고 있다.

용추의 동쪽언덕에 범사정이라는 절이 있다.

옛날 어느 만월밤 박진사라는 청년이 불고 있는 피리소리에 홀려서,

이 호수의 용녀가 그에게 반해 호수속으로 유인해가 버렸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는 슬픈나머지 폭포밑에 몸을 던졌다.

그 이후에 호수를 박연이라하고, 폭포밑 담을 고모담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옛날부터 조선 3대폭포 중 하나이다 폭포는

명유 서경덕(徐敬德)과 명기(名妓)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이른바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알려져 왔다>

 

 


개성성 내성 - 개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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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성 내성은 고려 수도성인 개성나성 안의

일부 구간을 막아 쌓은 성이다.

축성 공사는 고려시대 말(1391)부터

조선시대 초(1394)까지 진행되었다>

 

 

후릉 - 개성시 판문군 영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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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릉은 조선 2대 정종과 안정왕후의 쌍릉이다.

정종은 태종에게 왕위를 넘기고 물러나 개성 백룡산 기슭의

인덕궁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왕후가 1412년에 먼저 죽고

1420년에 정종이 죽어 이 능에 묻혔다>

 

 

황해도

해주 석빙고 - 황해남도 해주시 옥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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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 석빙고는 황해남도 해주시 옥계동에 위치한

고려 초기의 내부길이 28.3m, 내부 높이 4.5m인 석조 건축물이다.

우리 선조들은 오랜 옛날부터

얼음을 저장하기 위한 창고를 만들어 이용하였다>

 

 

 

 

咸鏡道

 

鏡城邑城 南門 - 함경북도 鏡城邑勝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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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門正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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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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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읍성은 1107년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축조한 토성이다.

1437년에 토성의 일부 구간을 석성벽으로 고쳤고,

현재의 성은 1616년부터 1822년까지

6년 6개월에 걸쳐 요고형 성벽으로 쌓은 것이다.

이때 성문, 성가퀴, 해자, 못, 우물 등이 갖추어졌다

남문은 1756년에 무지개문(홍예문)으로 개축하였고,

1838년에는 남문루를 고치고, 그후 수성문 현판을 달았다.

성벽의 높이는 9m에 이르는 곳도 있다.

성 사방에 각각 한 개씩의 성문을 내어, 정문인 남문은 수성문이라 하고,

동문은 용성문, 서문은 호위문, 북문은 현무문이라 불렸으나

일제시대에 파괴되고 현재 남문 만 남아 있다.

또한 성가퀴 510개를 4m에 1개씩 배치하여

새로운 공성무기에 대처토록 하였고,

이 성가퀴에 멀리 쏘는 구멍과 가까이 쏘는 구멍을 내었다.

성 안에서는 54개의 우물자리와 12개의 못자리,

수구문자리 등이 확인되었다.

성 둘레에는 너비 34m, 깊이 4.5m의 해자가 돌려져 있었다.

경성읍성은 우리나라 동북방어의 중진으로,

이 성을 중심으로 위성방어체계, 중간방어 체계,

전연방어체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 성의 독특한 축성형식은 수원성 등 후세의 성들에 계승된다>

 

 

 


鏡城邑 정북사 - 함경북도 鏡城邑 勝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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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의 화상

<정북사는 조선시대 건물로, 1437년에 건립하였으나

현재의 모습은 1901년에 중수된 것이다.

정북사는 12세기 초 여진족의 침입으로부터

고려의 동북국경지대를 지키는데

공로를 세운 윤관을 추모하는

사묘로 세종 19년(1437년)에 세웠다.

윤관은 당시 우리나라 동북 국경지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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