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을 쏟아 붓는 매섭고도 차가운 어느 겨울날. 뜨듯한 고향 아랫목 구들로 쏙 들어가고 싶어지는
귀소본능에, 발길은 어느새 따뜻한 남쪽 나라를 향한다. 봄이 온 냥 나비가 두 날개를 펼친 모양의 그
곳은 바로 경남 남해.
남해가 숨겨놓은 속살 고운 보물 …
살캉살캉 달큰한‘멸치예찬’
- 경남 남해 멸치회 |
원시어업 죽방렴으로 잡아올린 멸치는 담백하고 쫄깃한 맛이 뛰어나다
날개를 고이 접어놓은 지도를 펼치고는 3일 간의‘여정’에 점을 찍어댄다. 쪽빛 바다 위 초록빛 보석을
뿌려놓은 듯 아름다운 섬·섬·섬…. 어머니 자궁처럼 포근해‘가장 아름다운 바다’로 칭송받는 앵강만
벼랑 끝에 층층이 논을 내려 예술을 빚어놓은 다랭이마을, 새벽녘 멸치를 잡고 돌아오는 어부들의 고단
한 일상과 은빛 멸치떼들의 눈부신 춤사위가 묘하게 어우러지는 미조항. 아름다운 비늘을 벗으며 기꺼이
길손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멸치들의 작지만 큰 생애를 고스란히 담아놓은 죽방렴까지…. 지도는 어느새
까만 점으로 가득찬다. 순간 그대로 눌러앉고 싶어지는 충동이 인다.‘마음의 아랫목’없는 이들을 맛과
멋으로 보듬어 주는, 여기는 경남 남해이기에.
<맛 하나> 은빛비늘 퍼득이며 뭍에 오른 멸치, 죽어서야 빛나는 생애여! |
‘죽방렴멸치’라는 명찰을 달자마자 값은 타 멸치에 비해 곱절이나 비싸게 팔린다
어릴 적 우리네 아버지 최고의 술안주는 고추장 찍어 바른 마른 멸치였다. 이 멸치 대가리 두 어 점이면
비싼 안주도 필요없었던 게다. 술안주는 아니었지만 어머니 역시 멸치를 삶아서 찌개에 넣기도, 들들 볶
아 아이들 도시락 반찬으로 쓰기도, 젓갈로 만들어 김치의 맛을 내기도 했다. 고두현 시인은 멸치를 두
고 아름다운 비늘들, 죽어서야 빛나는 생애라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술안주든, 국거리든, 밥 반찬이든
늘상 우리와 함께 하는 작지만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멸치가 남해에서 특별한 변신을 시도했다.
바로 멸치회. 갓 잡아온 멸치를 남해산 막걸리와 야채와 초장으로 한데 버무려 맛을 낸 별미다. 멸치 본
연의 영양가는 물론이요, 달콤하면서도 새콤하고, 새콤하면서도 칼칼한 맛에 한번 맛 본 이는 결코 잊을
수가 없을 정도다.
‘대나무그물’에 모여든 통통한 몸통, 그 이름‘죽방렴 멸치’ |
죽방렴은 멸치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일몰명소로도 유명하다
멸치회는 미조항과 삼동면에서 맛볼 수 있다. 특히나 삼동면은 원시어업 죽방렴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
다. 지족해협에 V자 모양의 대나무 그물인 죽방렴은 길이 10m 정도의 참나무 말목을 물살이 빠르고 수심
이 얕은 갯벌에 박고 주렴처럼 엮어 만든 그물을 물살 반대방향으로 벌려놓은 원시어장. 거센 조류를 따
라 헤엄치던 물고기들이 통 안에 갇히게 되는데, 한번 들어온 고기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 그야말로
새장 속에 갇힌 새. 썰문 때 문짝을 열고 뜰채로 퍼 올리기면 비늘하나, 상처 하나 없는 싱싱한 멸치를
만날 수 있다. 자연 그대로의 방식으로 잡아 올린 멸치는 담백하고 쫄깃한 맛이 뛰어나기에 ‘죽방렴 멸
치’ 라는 명찰을 달자마자 값이 곱절이나 비싸게 판매된다. 남해 사람들은 멸치에 관해서만큼은 부산의
기장멸치와의 비교를 단연코 거부한다. 기장의 멸치는 너무 기름지고 뼈가 억센 반면, 물살이 빠른 곳에
서 노니는 죽방멸치는 운동량이 많아 육질이 쫀득쫀득하다는 것. 제철은 봄꽃이 피어나는 3월에서 5월사
이. 허나 남해에 가면 사시사철 싱싱한 멸치회를 맛볼 수 있다.
속살 고운 멸치회 … 막걸리 식초 넣어 비린내 없이 새콤달콤 |
 | 멸치쌈밥. 먹는 방법이 독특하다 | 삼동면 지족리에는 저마다‘원조집’임을 알리는 간판
을 내걸고 멸치회를 파는 식당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30년째 죽방렴에서 갓 잡아온 멸치를 손으로 일일이
대가리를 떼고 비늘을 벗겨 손님들에게 사시사철 싱싱
한 회를 내놓는다는 우리식당에 가 자리를 잡고앉았다
“이 멸치에 내가 청춘을 바쳤어요.”
남해에서 태어나 지금껏 멸치에 청춘을 고스란히 바쳤
다는 주인아주머니의‘멸치예찬’을 들으며 그 신신한
맛을 상상한다. 사실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멸치회’ 라는 것이 여느 회처럼 살짝 살점을 발라
내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남해
의 멸치회는 멸치무침에 가깝다. 잘 발라낸 멸치에 양
파, 풋고추 등 신선한 야채, 발간 양념장을 넣고 버무
려 낸 멸치무침 위에 깨와 참기름까지 데코레이션으로
얹혀진다. 고소함과 새콤함에, 또는 매콤함에, 미각과
후각이 동시에 자극된다. 멸치회를 집어 입에 한점 넣
어본다. 꼬독꼬독할 것이라는‘멸치 미감에 대한’ 편
견을 단숨에 엎어버리는 순간이었다. 마치 솜사탕처럼
입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씹히는 듯 마는 듯 스르르르
녹아버리는 것.
바람 부는 바닷가, 멸치회 한점, 소주 한잔이면 찰떡궁합 |
 | 마늘과 함께 쌈을 싸먹으면 더욱 깔끔하다 | 멸치 비린내도 없다. 그렇다고 멸치 특유의 향이 없어
진 것도 아니다. 고소하고 담백함은 그대로 살아있고,
거기다 새콤함과 달콤함, 매콤함이 함께 공존한다.
기자가 가지고 있는 미약한 글 재주로는 그 맛을 차마
표현할 길이 없다. 그저 직접 맛보길 바랄 뿐. 갑자기
술 생각이 간절해진다. 평소 소주 세 잔이면 고주망태
가 되어버리는 기자도 그 자리에 앉아 한 병을 쉽게
비워낸다.
“원래 멸치회는 소주 한 병 들고 바다를 보면서 먹어
야 되는기라. 그라면 아무리 추운 날씨라도 따땃해져.
술도 안취하지. 그게 멸치회 제대로 먹는 방법이여.”
이 조그마한 멸치 안에 무엇이 있간디 술이 취하지 않
는 걸까.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다. 멸치쌈밥도 별미다.
생멸치를 육수로 우려낸 다음 된장과 고추장을 풀어
끓인 뒤 양파, 마늘, 고추를 넣고 내장을 떼어낸 산멸
치를 넣어서 끓인 멸치찌개를 말한다. 여느 찌개와는
달리 먹는 방법도 특이하다. |
멸치회 외에도 멸치쌈밥은 고소하면서도 담백한 남해의 별미다
상추와 깻잎을 포개어 펼친 다음 완성된 멸치찌개에서 건져낸 멸치 두 어 마리 올리고, 초절임한 마늘과
된장을 얹어 싸먹는다. 마늘을 넣어 그런지 비린 맛도 없고 고소하면서도 감칠맛이 난다.
“아! 네, 알죠. 창선교요? 그 다리를 건너서 좌회전 하면…”
작년에 왔던 손님인데 그 맛을 못 잊어 다시 오겠다는 전화다. 그렇다. 이 기막힌 맛을 어찌 잊을 수 있
을까. 내년 이맘때쯤, 기자 역시 제대로 살이 올라 살캉살캉 씹히는 멸치회의 맛을 못 잊어 먼길마다 않
고 한 달음에 달려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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