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구리의 절벽 - 나희덕
먼지와 빗물 사이에서 봄날이 갑니다
말수 적은 비둘기들이
절벽 좁은 틈에 앉아 제 몸을 쪼고
드문드문 풀빛이 짙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옆구리에 끼고 사는 절벽은
산을 깎아 건물을 지으며 생겨난 것입니다
산속에 들어앉아 있는 셈이지요
요즘도 절벽은 제 몸이 잘려나가던 기억이 나는지
바람이 심한 날이면
투둑투둑 돌부스러기를 떨구곤 합니다
사람보다 절벽을 보고 사는 날이 많아진 저는
바윗결에서 숨은 집을 찾아내거나
어린 나무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잊혀진 얼굴도, 모르는 짐승도 저 안에 있습니다
돌의 이마에 눈을 맞추며
매일 다른 절벽을 옆구리로 낳아 놓으면
새들이 날아와 알을 품고
때죽나무가 절벽 아래로 꽃을 던집니다
절벽이 더러워지고 또한 씻기는 동안
먼지와 빗물, 제게도 수없이 다녀갔겠지요
이젠 어둠 속에서도 잘 들립니다
밤마다 절벽 위를 걸어다니는 소리,
그가 누군지 다음날 절벽을 보면 알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