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의자

[스크랩] 빈 집 - 황지우 외

무아. 2010. 3. 16. 14:34
빈 집

- 황지우


서까래는 찢어진 모자 채양처럼 내려와 있고
뜯긴 문풍지 바람에 온 집이 부르르 떨고 있다

여기, 난폭한 삶이 지나갔다
그러고 보면 집이란 사람 훈김으로 서 있는 것

박살난 장독대, 금간 시멘트 바닥에
고추 한그루 올라와 붉은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나가서 더 망하면
다시 돌아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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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어느 잡지에 실렸던 시,
그러나 시집에는 묶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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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

- 기 형 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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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가

- 강 연 호

이 집에서 마지막으로 밝힌 불빛은
근조등이었다고 한다 나는 부의금도 없이
이곳에 왔으므로 슬픔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너무 늦었다는 생각도 없다
대체로 인사치레의 조문이 아니라면
상가에서 정작 만나고 싶은 사람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인 것이다
죽은 사람이 그저 죽은 사람이듯
떠난 식솔들 역시 기다리지 않았으리라
한때 이곳에 쥔 붙였던 육신을 따라
빈집은 흙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창살과 문설주가 아직 버티는 것은
한꺼번에 무너지기 위한 악다구니일 뿐
햇살이 빈집의 서까래를 들쑤신다
언젠가는 저 햇살의 무게조차 견디지 못해
폭삭 주저앉고야 말 것이다
나는 곡비가 아니어서 울지 않는 게 아니다
어떤 숨죽인 울음도 헛되이
빈집은 녹슨 못처럼 고요를 구부러뜨린다
나는 다만 밥 짓는 냄새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간곡한 예를 올리고 돌아설 뿐이다




**강연호,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문학동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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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에 관하여

- 유 하


유채꽃 밭 너머 스러져 가는 빈집이 있다
할머니는 주인 잃은 강아지를 키우며
폐허의 마지막 숨길처럼 그곳을 지난다
처마를 영영 떠나 빈집과 내외하는 참새들
미련 많은 제비들도 더 이상 그곳에 집을 짓지 않고
이젠 오래 묵은 손?마저 집착을 버리고
썩은 지붕 위로 달아난다 고래고래
어둠의 플랑크톤을 다 잡아먹던 술고래 주인
아낙네의 밥그릇 ?지는 절규, 깨복장이 아이의 울음소리
한때 집안 가득 붐비던 고통의 손아귀도
한없이 가벼워 가는 빈집의 영혼을 어쩌진 못하리라
그리움 하나로 폐허를 견디는 것은 나의 일일 뿐
두 눈을 지우고 그저 무심으로 서 있는 빈집
봄날 햇살 저 혼자 칭얼대다가 이내
멋쩍은 듯 머릴 긁적이며 그곳을 떠나버린다
비록 악취일지라도 어쩌면 사람의 온갖 뒤척거림이
집 안에 마음의 눈동자를 달아주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빈집은 아무 걱정 없이
공기처럼 가볍게 사라져 갈 것이다
멸망을 찬양하고 괴로워하는 것도 사람들 몫이므로



** 유하, <세상의 모든 저녁>, 민음사, 1993





< 빈집 속의 빈집 >



땅 끝을 지나, 빈집에 들어서야/내가 빈집 속의 빈집이었음을

알겠네. 땅끝에 매달려/저기, 수척한 바다처럼 누워 있는

사람, 그 바다에/나는 얼마나 많은 섬들을 띄워놓았던가

말의 섬들,/햇살 속에 온갖 魚族의 비늘들로 반짝이던

그 다도해, 그러나 그 섬들은/ 이제 마당가에 뒹구는 빈 장독들처럼

불룩해진 배로/상상임신의 헛구역질만 하고 있음을 보네.

말의 뼈를 뽑아/삭아버린 서까레 하나 얹지 못한

덜컹이는 바람벽의 못 하나 되지 못한/빗방울 스미는

저 녹슨 함석 지붕 하나 떠받치지 못한/말의 무수한 발자국만 남긴

몸, 이제 이땅의 끝까지 지나왔지만/저기, 赤潮에 잠겨

잡풀 우거진 빈집으로 누워 있는 사람,/그 빈집에 들어서야

내가 빈집 속의 빈집이었음을 알겠네.



* 시인 김신용 1945 부산출생
1988년 [현대시사상]으로 데뷔
시집 <버려진 사람들>
<개 같은 날들의 기록>
< 몽유속을 걷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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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가을 밤 내 그리웠습니다
아직 오지 않을 사랑인 줄 알면서도
혹시 달빛으로 별빛으로
소식도 없이 올지도 몰라
아무도 서성이지 않은 산으로 가서
그대 잠들 빈집 되어 기다렸습니다
겸허하기만 한 가을 산 속엔
나무들 옷 벗는 소리 끊긴 지 오래고
새들 곤히 잠든 지 오래고
오직 그대 기다리는 내 빈집의 불빛만
흐린 날의 노을처럼 빛났습니다
멀리 있는 사랑을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뜨거운 눈물일지 알 수 없습니다
멀리 있는 사랑이 길을 돌아와
언제 문을 두드릴지 알 수 없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빈집 되어 깨닫습니다
누구를 사랑하는 일이
나를 훌훌 비워내는 일임을


-황청원 시집 <내가 온전히 나일 수 없음은
내 안에 그대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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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이후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
모든 것이 불타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
화산재에 덮이고 용암에 녹은 산기슭에도
살아서 재를 털며 돌아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돌무더기에 덮여 메말라버린 골짜기에
다시 물이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어 흘러간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 <부드러운 직선>, 도종환, 창작과비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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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아이는 홀로 남아 고드름이 되었다
추운 밤, 처마 끝에 매달려 몰래몰래 울었다

아버지 돌아온 뒤에도 아이는 몰래몰래 물방울이 되었다
추운 밤, 창문을 열면 처마 가득 고드름 주렁주렁 열렸다

그 아이 자라서 아버지 같은 어른이 되었지만
추운 밤마다 작아져 또르르 물방울이 되었다

지금은 몹시 추운 밤, 나는 빈집으로 가는 길을 안다

이홍섭 시집<<강릉, 프라하, 함흥>>/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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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나는 오래 폭설을 기다렸다

해평 마을의 빈집은 해면처럼 나를 빨아들인다
받아들일 수 없던 사랑, 낙동강의 결빙음, 매지구름은
내 육체가 붙들던 난간이었다
간유리문을 지날 때 어딘가 지독하게 아프다가
물바람마저 사금파리 빛 띄우면
히말라야시다는 가지 꺾고 귀로를 가로막는다
입술이 닿은 성에꽃에 매달린 내 청춘이
온기 한 점 구하지 못할 때
빈집은 폭설에 무너진다

그 사랑에는 육체를 피한 흔적이 있다

송재학 시집<<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민음사

출처 : 무아생각
글쓴이 : 무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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