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채(무아방)

[스크랩] 감꽃이 핀다

무아. 2010. 3. 15. 13:50
 

감꽃이 핀다








감꽃이 핀다.

일찍이 내 기억 밖으로 걸어나간 할배가

굶는 일에 이 갈려 일제 때 심었단 감나무

명 짧은 아부지가 자주 누렁이를 매달았고 

시집살이 고된 어무이가 남 몰래

설움못 박던 임씨 종가 감나무에

올해도 허연 감꽃이 핀다.

감꽃 잘 주워 먹던 먹보 큰누나는

열 아홉에 돈 벌러 대처로 떠밀려가고 

큰누나 대신 작은누나의 고무줄 잡아

한껏 같이 놀아주던 마당 감나무

나는 때때로 그 그늘 아래 쪼그려 앉아

감꽃을 하나 둘 실에다 꿰고는

버짐꽃 핀 목에 걸고 희망을 노래하곤 했다.

세월은 무정시리 키만 웃자라

몸도 마음도 고향 뜬 지 오래 됐건만

예순 줄 접어든 어무이는 올 가실에도

곶감 하나 더 얻을 거라고

아무도 지키지 않는 문중땅에

이른 봄부터 줄기차게 똥오줌 퍼부었을 것이다.

내가 죽고 우리가 죽고

우리 대가 역사처럼 아스라이 사라진 뒤에도

대를 이어 터 지킬 마당 감나무

까맣게 잊혀진 옛 얼굴들이 살아 살아

올해도 모질게 허연 감꽃이 핀다.



출처 : 무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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