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Quintet Circa 1987 (Malvicino, Console, Piazzolla, Suarez Paz, Ziegler)
Photo Taken from the CD "La Camorra", Americam Clave 1988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상징이 되어있는 아스토르 피아졸라지만 1921년 이곳에서 약 400km 떨어진 마르 델 플라타에서 태어나 세 살 때 그의 가족과 함께 약속의 땅 뉴욕으로 향했다. 거기서 이후 그의 작품에 눈에 띄게 영향을 준 재즈를 흡수하는 한편, 이후 그의 인생을 함께할 악기 반도네온을 처음으로 얻게 되었다.
이 시기 그의 아버지는 뉴욕의 건달들이 드나들던 이발소를, 어머니는 그들의 부인과 여자친구들이 드나들던 미용실을 운영했다. "한번은 유태인 건달이 와 있는데 이탈리아 건달이 들어오더니 서로 싸우다 결국 죽이더군." 피아졸라 는 유명한 권투선수 록키 마르시아노 Rocky Marciano 가 이끄는 패거리의 일원이면서 큰 야구경기의 출전을 앞둔 투수였지만 곧 그들로부터 도망쳐 바하를 공부하기 위해 숨어버렸다.
1930년대 말 전쟁이 임박해오며 미국도 더 이상 안전한 피난처가 될 수 없었고 피아졸라는 그의 고향 마르 델 플라타로 돌아왔다. "나는 마치 화성에서 온 외계인이었다. 반도네온으로 랩소디 인 블루를 연주하는. 모든 탱고 음악인들은 날 미친 녀석이라고 했고." 가까스로 탱고 오케스트라에서 일자리를 구했지만, "급여를 받으러 가니 그러더군요. "뭐? 돈을 달라고? 넌 돈 못 받는 걸 배우러 여기 들어온 거야."" 얼마후 그는 새로운 기회를 잡으려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떠났다.
그를 존경해 마지않던 피추코 Pichuco 는 아스토르는 단순한 반도네온 연주자 이상이라며 항상 그를 지지했으나 몇가지 문제점들이 표출되었다. "그는 항상 내게 이상한 것을 쓰지 말라고 하거나 심지어 직접 삭제해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피아졸라는 그의 천재성을 그렇게 묶어두지 않고 그 보수적인 환경에서 떠나기로 했다. "어느날 내가 복잡한 화음을 소개하자 일은 터졌다. 연주자들이 럭비선수들처럼 몰려와선 날 미친놈으로 몰아세웠다."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는데 지친 그는 그곳을 떠나 그만의 밴드를 결성했다.
그때가 바로 새로운 탱고의 출발이 되었다. 음악에서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이 시기 그는 마흔다섯 장의 음반을 발표하는 한편 3인밴드와 9인밴드를 결성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청중들은 이해하지 못했으며 음반기획사 또한 그의 작업을 외면했다. 크게 실망한 그는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파리로 떠났다.
프랑스에서 그는 가장 빛나는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추모한 'Goodbye Nonino'와 'Maria of Buenos Aires' 그리고 'Ballad for a Crazy'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영화 '가르델의 망명'의 곡들은 그에게 Caesar 상을 안겨주었으며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특별한 시민'으로 추대되었다.
"피아졸라는 누구도 넘보지 못할 탱고의 거장이다." - New York Times
"그는 인기는 롤링 스톤즈를 따라가지 못했지만 그의 음악은 훨씬 오래 남을 것이다." - La Stampa
1990년 8월4일 뇌를 다친 이후 심한 고통은 23개월이나 그를 괴롭혔고 결국 회복하지 못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이끌었던 밴드의 일원이었던, 작곡가이자 반도네온 연주자인 Daniel Binelli는 말했다.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표현하는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냈고 그것은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피아졸라는 반도네온으로 표현된 부에노스 아이레스 거리의 음악, 바로 그 자체였다.
from : 'Buenos Aires spin' Translated by Eun J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