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어떤 사나이의 파란만장한 삶
오늘 발견한 건데 낚시질하다 퍼왔답니다.
진정한 패러디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수작(秀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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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 홀로 남은 지도 어언 4년.
이제 모든 게 아련하다. 돈도 못 벌어오는 게 힘도 못 쓴다고 밤마다 구박하던 마누라의 바
가지도, 싸가지 없이 부모 고마운 줄 모르고 키만 커가던 자식 새끼도, 툭 하면 전화를 걸어
와 외상값 갚으라고 닥달하던 초원 단란주점의 미시 리도 모두 가물가물하다.
도박에 손을 댔다가 집 날리고, 자동차 날리고, 몸 버린 게 7년 전의 일이었다. 빚쟁이들은
FBI보다 더 집요하게 나는 추적했다. 나는 2년간 여자 분장을 하고 도피 생활을 했다. 그러
던 어느 날, 호프집에 간 나는 빚쟁이 중 너무 질기다 하여 '고래 심줄'이란 별명을 가진 빚
쟁이와 맞닦드리게 되었다. 물론 2년간의 변장 노하우로 완벽한 변장을 했기에 그가 나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맥주를 들이붓다보니, 나도 모르게 화장실을 가게 되었고, 무심코 남자 화
장실에 가서 치마를 올리고 서서 볼일을 보던 나는 옆에서 볼일을 보던 고래 심줄과 눈이
마주쳤다. 고래 심줄이란 별명과는 달리 놈의 물건은 새우만했다. 그리고 눈앞이 번쩍하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새우잡이 어선이었다. 고래심줄은 나를 새우잡이 어선, 일명 멍텅구리에 팔아넘긴
것이었다.
거기서 죽도록 새우를 잡으며, 1년을 보냈다. 1년이 지나고나자, 새우라면 '새우깡'만 보아도
신물이 넘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에 딱 10분 있는 휴식 시간에 새우깡에 소주를 마시
며 쉬다가 나는 동료들에게 고래 심줄의 물건에 대해 농담을 했다. 동료들은 배가 뒤집어지
도록 웃었고, 그로 인해 마침내 배가 뒤집히고 말았다.
태풍이 오려던 참이라 파도는 거칠었고, 나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파도
가 나를 떠미는 대로 흘러갔는데, 정신이 들어보니, 이름모를 섬의 해변가였다.
과거 KGB(코리안 그레이트 방위) 출신인 이력을 되살려 섬 일대를 한 시간에 걸쳐 수색정
찰했지만, 사람이라고는 수영치다 지쳐 익사한 새우잡이배 동료들의 시체 뿐이었다. 나는 모
래사장에 동료들의 시체를 묻고 비석에 이렇게 썼다.
"새우잡이들, 고래 심줄 얘기에 배가 뒤집혀 죽다."
섬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이었다.
섬 어디를 둘러보아도 먹을만 한 거라고는 단 하나, 새우잡이 배에 실려 있다가 파도에 떠
밀려온 새우깡 두 박스 뿐이었다. 나는 그게 왜 물 속에 가라앉지 않고, 떠내려올 수 있었을
까 한 동안 추측해보았다. 그러다 일순 깨달았다.
'공기주입포장'
그렇다. 비밀은 공기주입에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과자 하나에도 담긴 우리 나라
식품 기업의 과학성에 새삼 감탄하며, 새우깡을 먹었다. 두 달간 새우깡만 먹으면서 연명했
다. 물은 비가 올 때마다 새우깡 봉지에 담아 보관해두었다가 조금씩 먹었다.
섬에 있자니, 너무도 심심했다. 혼자 부른 노래만도 193, 409곡에 이른다. 특히 새우깡을 먹
을때마다 떠올랐던 새우깡 주제가는 자그마치 12, 392번이나 불렀다.
"손이 가요~ 손이 가~ 새우깡에 손이 가요~ 아이 손 어른 손 자꾸만 손이 가~..."
상상이나 가는가. 그 끔찍함이...
게다가 텔레비젼도, 라디오도 인터넷도 하다못해 읽을 '사건과 실화' 한권 없는 그 곳에서
유일하게 읽을 꺼라고는 새우깡 포장지 뿐이었다.
'생새우로 만든 농심새우깡'부터 'DHA 첨가'를 지나 1봉지당 들어 있는 영양성분이 몇 mg
씩인지, DHA는 무엇이며, 칼슘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또한 새우깡의 주원료는 무엇이며,
보관상 주의사항은 무엇인지, 그리고 농심의 홈페이지 주소는 무엇인지에 이르기까지 새우
깡 봉지에 쓰여진 모든 정보를 일일이 다 읽고, 또 읽고, 계속 읽었다.
누군가 '가장 인상깊었던 책은?'이라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새우깡 봉지'라고 대답할
것이다.
덕분에 나는 새우깡 박사가 되었고, 새우깡에 함유된 DHA가 3. 6mg이며, 그것의 원산지가
일본이라는 것도 외우게 되었다. 그 뿐인가. 외롭고 무서울 때면, 새우깡 봉지에 쓰여져 있
는 문장 중 가장 긴 '칼슘이라 하면 뼈나 치아를 만드는 영양분으로 성장 발육이 왕성한 어
린이에게 빠뜨릴 수 없는 영양소입니다. 뼈는 칼슘은행 역할을 하여 많을 때는 저축하고, 부
족할 때 인출하여 보충해줍니다. 농심 새우깡은 천연칼슘이 많은 바다새우를 원료로 하여
만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는 맛있는 영양간식입니다.'를 외우면서 외로움과 무서움을 이겨
냈다.
새우깡이 다 떨어지고나자, 나는 바위 틈에 달라붙어 있던 소라 및 각종 어패류들을 따서
새우깡 봉지에 담아 가져왔다. 그러나 날로 먹었다가 다리에 힘이 풀리도록 내내 설사를 한
후에야 어패류는 만드시 익혀먹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불을 지피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영화에서 본 대로 나무대기를 통나무 홈 파인 곳에 죽어라고 비벼 보았지만, 불은 붙지 않
았다. 그래도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비볐다. 지문이 거의 닳아 없어질 정도였다. 불을 붙인
것은 나무를 비비기 시작한지 꼬박 하루만의 일이었다.
"불이다!!!"
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하늘로 번쩍 들고 소리쳤다. 그 때 바지의 호주머니에 난 구
멍을 통해 뭔가가 발 밑으로 툭 떨어졌다.
그건 가스가 가득찬 불티나 라이터였다.
그 후로 나는 그 섬을 나의 천국으로 만들었다.
섬 가운데에 있는 웅덩이를 개조해 개인 수영장으로 만들고, 물레방아를 직접 만들어 물의
낙차를 이용해 전기도 일으켰다. 또한 평평한 평지를 다듬어 개인 골프장도 만들었고, 자연
재배한 대마초를 말아피우며 손에서 레이져 광선이 나가는 환상을 경험하기도 했다. 날아가
던 갈매기를 짱돌로 맞추어 떨어뜨린 뒤 날개를 부러뜨려 가축으로 기르며, 영양식 겸 애완
동물로 삼았고, 번식도 시켰다. 자연산 포도를 따서는 술을 담갔고, 술을 비축해두는 빠도
만들었다. 이 모든 걸 내 손으로 이룩하는 데에 자그마치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나는 혼자 살아도 사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는 나만의 문명을 이룩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배 한 척이 섬으로 다가왔다. 배에서 내린 사람은 다름아닌 '고래 심줄'이
었다.
나를 보자, 고래 심줄은 무척 놀라는 눈치였다.
터질 듯한 억하심정을 억누르며 무슨 일로 이 섬에 왔느냐고 묻자, 놈은 대답했다.
"뭐, 별 일은 아니고, 나가 몇 년 동안 새우 팔아서 돈 줌 벌었는디, 이 섬을 사분졌어. 이
섬을 개조해서 대규모 위락시설을 지을 참으로다 지형 검토를 할라고 여그 왔는디, 니는 여
그 뭔 볼 일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