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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용한의 시집, `안녕, 후두둑씨` 와 그의 책들

무아. 2010. 3. 15. 00:06



 안녕, 후두둑씨                                      

 

후두둑 씨에게 늦은 소포가 온다

나는 잘 있다고 포장된 외로운 책이다

갈피마다 부엌에서 침대까지 걸어간

발자국이 적혀 있다

후두둑 씨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외투를 걸치고 식탁에 앉는다

지난 봄에 들여놓은 아들 녀석이 잠깐

불가사의한 안녕을 묻는다

낡은 커피라도 드릴까요?

후두둑 씨에게 인생은 앉아있는 것이다

뒤꿈치가 닳아서 무표정한 의자가

매일같이 삐걱이는 후두둑 씨를 기다린다

사뿐히-- 갈라진 여백을 중얼거리며

아들아 거의 다 왔다

문이 닫힌 아내가

지붕 위에서 성큼성큼 쏟아져 내린다.

 

 

덧말 아재를 추억함

 

숙모집에 얹혀 살던 덧말 아재의 오래된 전축에서

처량하게 흘러나왔지 배호의 목소리였던가

안개 낀 장충단공원 누구를 찾아왔나,던

그때 나는 국민학생 라면땅,건빵,눈깔사탕

내 그리움은 오직 먹는 것에만 있었을 터,

아버지의 멀쩡한 고무신을 숨기고

일주일 후에나 올 엿장수를 기다렸다

그리고 난 여물통 앞에서 죽도록 맞았지

꿈벅거리던 암소의 눈방울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날도 덧말 아재 방에선 누가 우~울어,하는

배호의 목소리,내 눈물을 닦아주던 아재의 손,

일 원짜리 눈깔사탕,

난 도랑 건너 버드나무집까지 편지배달을 갔다

내가 보는 앞에서 아재의 편지를 북북 찢던 그 누나

그년 때문에 아재는 두번씩이나  농약을 마셨다

아재 나이 스물 몇이었더라 읍내 병원에서

윗속을 깡끄리 청소하고 돌아온 아재는

천정 벽지에 그려진 아메바 무늬만 넋없이 올려다 보았다

이후,늘 꿈에 취해 살던 몽유병의 사내

꿈속에서도 꿈을 찾아 하늘을 헤매던

그에게는 끝까지 배호의 음성을 들려주던 오래된

전축만이 소중했다

그에게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그의 유품이 된 전축,

배호보다 먼저 간,

나에게 지금 그의 모습은 없다

그를 떠올릴때면 배호의 처량한 목소리와

낡은 전축만이 떠오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를 무등 태우고,서울이 보이니?

어디까지 보이니?,  하던

자신의 꿈을 내 눈을 통해 보려 했던

덧말 아재,

아무도 그를 무등 태워 주진 못했다.

 

 

 

까닭 모를 슬픔

 

창밖을 본다

저 몸밖의 나무들

벗을 것 다 벗은 나무의 몰골이란!

-뭐가 보이나?

사장이 다가와 너의 시야를 가린다

너는 나무와 너의 눈을 가로막은

그 뚱뚱한 몸집의 방해자를 치워버리고 싶다

그에게 너는 이렇게 묻고 싶었다

때때로 찾아오는 까닭모를 슬픔에 대하여  너 아니?

저 깊은 슬픔의 저탄장으로부터 불현듯 솟구쳐오르는

시커먼 슬픔 덩어리에 대하여......

 

소주방에서 혼자 술 마시는 남자

고개숙인 남자

처자식이 있어도 외로운 남자

취하는 남자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어 토하는 남자

그 손가락으로 아파트 초인종을 누르는 남자

여보! 보약먹을땐 술 좀 마시지 말라고 했죠? 했어요, 안했어요?

보약이 없으면 곧 무너질 것 같은 남자

애들 보기가 민망한 남자

아내 앞에서 쇠퇴한 성기를 억지로 발기시키는,

눈물겨운 남자.

 

 

-- 이용한 詩

 

 

 

 


안녕, 후두둑씨

 

책소개
기행 산문집 이색마을 이색기행으로도 유명한 시인 이용한의 두번째 시집. 이번 시집에서는 수상한 당나귀가 방 안을 접수하고, 긴수염고래가 술에 취한 후두둑 씨를 잡아 당기는가 하면, 적멸한 달밤에 길짐승이 '모텔 맙소寺'를 찾아 헤맨다. 시종일관 현대판 산해경인 듯 기이한 변종과 변질된 사물로 가득한 시편들은 문법과 기표의 교묘한 전위를 보여주고 있다.

지은이 소개


이용한 - 1968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1995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하였다. 지은 책으로 시집 「정신은 아프다」와 문화기행서 「사라져가는 오지마을을 찾아서」「꾼」「장이」「사라져가는 이 땅의 서정과 풍경」「이색마을 이색기행」「솜씨마을 솜씨기행」「옛집기행」 등이 있다.

책 표지 글
이용한의 시에는 무수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그것은 그가 무수한 육체로 걸었던 풍경(風景)이면서 풍경(諷經)이다. 그래서 그의 풍경 속에는 장소에 대한 감회가 없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경전(經典)도 감회를 허락하는 경전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용한의 시에는 떠도는 육체와 방황하는 정신이 각각 존재한다. 정신의 풍경(諷經)이 육체이고, 육체의 풍경(風景)이 정신인 이용한의 시에는 그래서 시적 화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의 고향으로 방황의 장소가 마땅하다면 떠도는 육체의 피곤함은 곧 이용한의 시의 장소다. 장소를 육체로 삼고 있는 자는 무수한 시를 쓰게 마련이다. 이 비극이 바로 이용한 시의 긴장이다. - 함성호 (시인)

 

이용한의 시는 '지금ㅡ이곳'의 바깥을 향하고 있다. 추억의 한 장면에서 멈춰버린 시간은 도시적 삶의 원초적 속도와 날카롭게 대립한다. 그의 시에는 7번 국도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와 도시라는 '지옥'에 좌초된 긴수염고래가 산다. 현재를 긍정할 수 없는 존재들에게 삶이 '민박집'이나 '여인숙'에서의 하룻밤과 다른 게 무엇이겠는가. 그리하여 이용한의 시는, 한편으로는 추억과 기억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에, 또 한편으로는 '지금ㅡ이곳'의 삶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추억이란 돌아오지 않는 시간에 불과할 뿐, 시집 전체에서 환기되는 '고독'은 '기다림'과 '그리움'이 물리적 시간법칙에 의해 배반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일까? '후두둑 씨'가 몰고 오는 비에서는, 눈물의 그것처럼, 짠 내음이 난다.

- 고봉준 (문학평론가)

 

 





자료: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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