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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울 4대문

무아. 2010. 3. 14. 00:33

서울 사대문의 동서남북과 가운데 지명은,,

오상(五常),, 즉 유교에서 사람이 항상 지켜야 할 5가지 도리,,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순서에 맞추어 작명하였습니다.

 

살펴보면,,

 

동대문은 흥인지문 (興仁之門 - 인을 일으키라.),,

서대문은 돈의문 (敦義門 - 의를 돈독히 하라.),,

남대문은 숭례문 (崇禮門 - 예를 숭상하라.),,

북대문은 홍지문 (弘智門 - 지혜를 넓혀라.),,

가운데는 보신각 (普信閣 - 두루 믿어라.),,

 

이름에 오상을 넣으신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어질고(仁),, 의롭고(義),, 윗 사람을 공경하고(禮),,

지혜롭고(智),, 신의를 지키도록(信),,

스스로를 다듬어 가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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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대)문의 경우 숙정문(肅靖門)이라고 합니다. 왜 지(智)자가 들어 가지 않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몇가지 설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원래 북대문의 명칭은 숙청문(肅淸門)이었는데 이후 숙정문(肅靖門)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조선 초의 기록을 보면 풍수설과 음양설에 따라 숙정문을 닫아 두었거나 열어 놓기도 하였습니다. 그 예로 태종 13년(1413) 6월에 풍수학자 최양선이 풍수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이 되는 창의문과 숙정문을 통행하는 것은 지맥(地脈)을 손상시킨다는 상서(上書)가 있자, 마침내 이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의 통행을 금지하였습니다.

 

그 후 태종 16년(1416)에는 기우절목(祈雨節目)을 만들어 가뭄이 심하면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았으며, 비가 많이 내리면 숙정문을 닫고 남대문을 열게 하였습니다. 이는 북은 음(陰)이요, 남은 양(陽)인 까닭에 가물면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하는 음양오행설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한편 조선시대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숙정문을 열어 놓으면 서울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 지므로 항상 문을 닫아 두게 되었다고 소개하였습니다.

 

한양의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에는 '지(智)'자를 넣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사대문의 이름을 정할 때 문 이름에 지혜로움을 의미하는 '지(智)'가 들어가면 백성이 지혜로워져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지(智)'자 대신에 '청(淸)'자를 넣었다고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숙청문(肅淸門)'으로 불리다가 중종 때부터 '숙정문(肅靖門)'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것은 원래 북쪽이 음양오행설에서 음기와 물을 상징하기 때문에 북문이 주로 기우(祈雨)를 위하여 열리면서 소음을 피하기 위하여 시장을 옮기고, 북 치는 것을 금지하는 것과 관련하여, 정숙한 기운을 진작시키는 의미에서 '청(淸)'대신 조금 더 조용한 의미를 지니는 '靖(편안할 정, 조용할 정)'을 쓴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펌 : 네이버 지식 iN]

 

 

숙정()[―쩡―][명사] 조선 태조 4(1395) 세운, 서울 북쪽 정문.

 

.

     1. 명칭
     숙정문(肅靖門)은 서울 도성의 북쪽 대문으로 처음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었다. 숙정은 '북 방 의 경계를 엄하게 하여 도성 안을 평안하고 정숙하게 한다'는 뜻으로, 숙청은 '도성 북쪽의 경계를 엄하게 하여 도성 사람들이 정숙하고 맑은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한다'고 해석할 수 있어 그 뜻이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 초 성문의 이름을 붙일 때 유교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가운데 오행(五行)에 따라 방향을 잡아 동쪽은 인(仁), 서쪽은 의(義), 남쪽은 예(禮)를 취하였으나 북쪽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북쪽인 지(智)는 18세기 초 숙종 연간에 탕춘 대성(蕩春臺城)의 성문인 '홍지문(弘智門, 일명 漢北門)'으로 보강된다. 그리고 중앙의 신(信)은 19세기 말 고종 연간에 종루의 이름을 보신각(普信閣)이라 하면서 오행이 갖추어졌다.
     숙청문(肅淸門)은 태조 5년(1396) 9월 도성의 제2차 공역이 끝나고 도성 8문이 준공되었을 때에 함께 이루어져 이름이 붙여졌으며, 속칭 북문(北門)이라 불리었다. 그런데 태조 13년 6월 풍수학생 최양선(崔揚善)이 습揚풩오 창의문과 관광방(觀光坊)의 동령(東嶺)에 있는 숙청문은 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과 다리 같으니 길을 내어 지맥을 손상시켜서는 안된다쉼 하면서 문을 막고 통행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숙청문과 창의문을 폐쇄하여 길을 막고 거기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그 후 숙청문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닫혀진 문으로 존재하게 된다. 북문이 열리는 때는 주로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행하는 시기였다. 숙청문 은 이처럼 폐쇄된 문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인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주로 북문 으로 칭하고 있으며, 중종 18년부터 숙정문(肅靖門)이라는 표현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후 로는 두 명칭이 혼용된다. 이름이 달라지기 시작 한 연유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다만 한자 표기를 달리 하여 중종 26년 북정문(北靖門)이라는 표현과 선조 20년의 숙정문(肅靜門)이라는 표현 이 있는 것과, 북문이 주로 기우(祈雨)를 위하여 열리면서 소음을 피하기 위하여 시장을 옮기고, 북 치는 것을 금지하는 것과 관련하여, 정숙한 기운을 진작시키는 의미에서 발음이 조용한 숙정문으로 바뀌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해 보게 된다.

     2. 위치와 기능
     숙정문은 종로구 삼청동 산 2-1번지 즉, 서울 도성의 북쪽에 위치한다. 북악의 산줄기에서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휴암 부엉바위, 현장 정보장교의 말에 의하면 산줄 기의 끝에 있는 바위라 하여 말(末)바위라 부른 다고 함]과 응봉(鷹峰, 성균관대학교 뒷봉 우리)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삼청터널이 있는 산언덕에서 북쪽으로 오르면 숙정문을 만나며, 삼청각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면 서울성곽과 함께 숙정문이 보인다.
     한편 연산군 10년 7월에 숙청문을 오른쪽으로 약간 옮기라고 명령한 기록이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군사상 도성 방 위와 순찰에 있어 지대가 높고 험하여 통행 하기 불편하였으므로 보다 편리한 곳으로 옮겨 지은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때는 연산 군이 폐위 1년여를 앞둔 시절로 여러 가지 방탕하고 난폭한 일을 저지르면서 성균관을 폐쇄하여 놀이터로 삼고, 그 북쪽에 있는 숙청 문도 아주 막아버리고
오른쪽으로 새 문을 만들게 한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 말기에는 각종 공사를 벌이는 명령과 지시가 남발되지만 이행 여부를 확인하는 내용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숙청문 의 이설 문제도 지시만 있었고 실행되지는 못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는 현장 검증 등을 통 하여 구체적인 판단이 필요한 사항이라 하겠다.
     숙정문은 도성의 북문으로 그 기능은 서울 에서 의정부를 거쳐 원산과 함경북도로 이어 지는 관문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숙정문 은 4대문·4소문을 갖추고자 했던 조선왕조 도성의 성문 체제에 따라 축조되기는 하였지만 실질적인 기능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근에 사람이 살지 않았고 교통로가 필요하지 않은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문의 기능은 동소문인 홍화문(후에 혜화문)과 동대문인 흥인문이 대신하였던 것이다.

 

 

성북동 계곡 막바지에서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도성 4대문의 하나인 속칭 북문이라 하는 숙정문이 나온다. 이문은 서울의 정북에 위치한 문으로 4소문의 하나인 창의문과 함께 양주와 고양으로 왕래하는 통로로서 태조때 다른 성문과 함께 축성되었으나 연산10년(1504)에 원래 위치에서 얼마간 동쪽으로 이전되었다.

이 문은 건립된지 18년뒤인 태종 13년(1413)에 풍수지리학자 최양선이 풍수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이 되는 창의문과 숙정문을 통행하는 것은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리자 조정에서는 이 두문을 폐쇄하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 시켰다한다. 다만 가뭄이 심할때만 비를 오게 하기 위하여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았다한다.

이 풍속은 태종16년(1416)부터 있었다하는데 이는 음양오행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외에도 오주연문장전산교란 책자에 따르면 이문을 열어놓으면 장안의 부녀자들이 풍행이 음란해 지기때문에 항상 문을 닫아 두었다는 속설도 아울러 전해 오고 있다.

그리고 음력정월대보름때가 되면 민가의 부녀자들이 대보름전 숙정문에 3번 가서놀다오면 그해의 재앙을 면할수 있다하여 많은 부녀자들이 이곳을 찾았다 하며, 그리고 또 오래토록 비가 오면 국가에서 4대문에 나아가 영라는 비를 그치게 하는 기청제를 거행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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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사대문은 지금과같은 위치로 성벽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의 동 서 남 북의 대문구실을 한것입니다.

서울의 사대문:

동대문(흥인지문:興仁之門) : 동쪽은 오행상 木이요, 仁을 상징한다.
동대문만 유일하게 흥인지문이라 하여 之자가 첨가된 것은, 옛부터 동쪽이 낮아
왜구의 침입을 많이 받으므로 동쪽의 기운을 높이는 뜻에서 산맥을 뜻하는
之자를 첨가함.

서대문(돈의문:敦義門) : 서대문은 본래 흥인지문에서 광화문을 통과하는 일직선상에
있었으나, 그 문밖의 경사가 가팔라 통행에 지장이 많다하여, 세종 연간에 약간 남쪽으로 옮겨 문을 새로 내었다.
그래서 오늘날 ‘새문안’이니 ‘신문로(新門路)’니 하는 지명의 흔적을 남기고,
그나마 일제에 의해 헐리어 없어졌다. 오행상 金이요, 義를 상징한다.

남대문(숭례문:嵩禮門) : 오행상 火요, 禮를 상징한다.
숭(嵩)자는 원래 염(炎)자와 同一하며, 비상(飛上)을 상징한다. 이는 궁궐을 직면하는
관악산이 불산이라 그 불기운을 누르기 위함이다. (지금 광화문 앞의 해태상도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북대문(홍지문:弘智門) : 북문은 오행상 土요, 智를 상징하며, 현재 삼청동 터널 위쪽에
복원해 놓은 숙정문(肅靖門)이다. 그런데 이 숙정문은 본래 방위에 맞추어 문을 내기는
했지만 문의 구실을 하지는 않았다. 숙종문 이후에는 풍수설에 의해, 북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淫氣)가 침범하여 서울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해 진다 하여, 문을 만들어
놓기만 했을 뿐, 그곳을 통해 드나들지는 않았다. 대신 숙정문에 들어 서북쪽으로
약간 비껴 오늘날 상명대학교 앞쪽에 홍지문(弘智門)을 내고 그쪽을 통해 다니게 되었다.

->다른 곳에서 참고한 내용이지만 북대문은 그래도'숙정문'이다.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의 성문인 '홍지문'은 원래 [한북문]으로 불리다, 숙종의 '홍지문'이라는 편액을 받고 이후 그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따라서 홍지문이 오행상 북문의 역할을 한것이지 서울도성의 북문은 '숙정문'이다.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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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문:
조선조 초에 정도전(鄭道傳)은 한양의 성문과 중앙의 종루 이름을 사람이 살아가면서 늘 지켜야 할 다섯가지 도리, 즉 인(仁) 의(義) 예(禮) 지(知) 신(信)의 오상(五常:五行)을 따서 붙였다. 그리하여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돈의문(敦義門:서대문), 숭례문(崇禮門:남대문), 홍지문(弘知門), 보신각(普信閣)이란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서울의 4대문이라 하면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만을 떠올린다. 어찌된 일인지 ‘북대문’하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이는 북대문이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에 있는데다 풍수지리설과 속설에 휘말려 창건한지 18년만에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사적 10호)은 북한산 동쪽 산마루턱의 성북구 성북동 계곡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숙정문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나라를 세운지 5년만인 1396년에 완공하였던 것. 그러나 당시 풍수학자 최양선(崔楊善)이 “동쪽, 서쪽 봉우리는 정궁인 경복궁의 양 팔과 같아 닫아 두어야 한다”고 건의, 축조한지 18년만인 1413년에 폐쇄하였다.

그 뒤 가뭄이 심하면 음의 기운이 강한 숙정문을 열어 비가 오기를 기원했으며 장마가 심하면 닫았다고 한다. 또 순조때 실학자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은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篆散袴)’에 ‘숙정문은 음의 자리에 있어 열어두면 서울 장안의 여인네들이 바람난다’고 쓰고 있다. 이는 정월 보름 이전에 숙정문을 세번 오가면 액운이 없어진다고 해서 부녀자들의 나들이가 많아지자 남정네들도 모여들어 풍기가 문란해졌기 때문에 그와 같은 속설이 퍼진 것이라 한다.

어찌되었던 조선왕조는 왕도를 정하면서 철저히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도시계획을 구상했던 것이다. 때문에 서울의 도성이나 궁의 배치, 문루는 물론 심지어는 하천의 흐름, 산세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풍수와 관련지어 그 의미와 상징성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풍수에 대한 이해없이는 서울의 유적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숙정문은 태종 13년에 폐쇄된 채 있다가 1504년(연산군 10년)에 동쪽으로 약간 옮겨 석문만 세웠던 것을 1976년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하면서 문루를 짓고 ‘숙정문’이란 편액을 달아 오늘에 이른 것이다. 현재의 숙정문은 군부대의 바깥 쪽에 있어 보안상의 이유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채 굳게 잠겨있다. 역시 숙정문은 예나 지금이나 폐쇄되게끔 되어 있는가 보다!

 

서울성곽에는 도성8문, 즉 4대문과 4소문이 있어 도성의 안팎을 연결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소문이 하나 더 있어 9개의 성문이 있었다. 조선 초에 있었던 남소문은 광희문 남쪽 남산 봉수대 동편되는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1469년 폐문되었다.

□ 원래의 문은 죽음길의 문이 된다고 없애 버려

 

광희문은 원래 남소문(南小門)을 가리키던 것이었다. 지금의 타워호텔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마루에 있던 문이다.

광희문이 세워진 것은 세조 2년(1456)이었다. 그런데, 대궐에서 보면 동남쪽의 이 문이 음양설로 따져 손방(巽方)에 해당, 왕궁의 황천문(黃泉門)이 되어 불길하다고 여겨 예종 원년(1469)에 문을 폐쇄해 버렸다. 그러나, 남쪽에 단 하나 있는 소문(小門)을 아예 없앨 수는 없어 1719년 이 문 북쪽 지금의 자리인 광희동2가에 새로이 남소문을 짓고 원래의 문에 있던 '광희문' 현판을 옮겨 달았다.

광희문은 나라의 큰 변란이 있어 사람들이 많이 죽곤 할 때면 더욱 복잡했다. 장안에 전염병이 돌 때도 그랬다.

광희문을 나오면 대개 근처의 작은 고개를 넘어 금호동 공동묘지로 가거나 신당동 화장터로 갔다.

1880년대 말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 장안의 아이들이 많이 앓거나 죽어 갔는데, 장안의 어려운 사람들은 환자를 피막(避幕) 같은 곳에 아무렇게나 방치했다가 숨을 거두기도 전에 이 문 밖에 내다버리기도 했었다. 이 때문에 당시 광희문 밖에는 이미 죽었거나 신음하며 죽어 가는 아이들로 생지옥을 이루었다. 이러한 비참한 모습을 옆에서 몇백 년을 지켜보아 왔던 문이 바로 광희문이다.

사람들은 이 때문에 이 문이 원귀(怨鬼)들과 사귀어 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 문의 돌가루라도 취하면 병마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광희문의 돌가루를 치료제로 여겨 몰래 긁어 간 풍습은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되었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정남에 숭례문(崇禮門:지금의 서울 남대문), 정북에 숙청문(肅淸門), 정동에 흥인문(興仁門:지금의 서울 동대문), 정서에 돈의문(敦義門)을 세웠다. 숭례문은 1398년(태조 7)에 창건하여 1448년(세종 30)에 개축하고, 1479년(성종 10) 다시 개축한 것을, 1962년 중수(重修)해서 오늘에 이른다.

숙청문은 축조한 지 18년 만인 1413년(태종 13)에 문을 폐쇄하였다가, 1504년(연산군 10)에 동쪽으로 약간 자리를 옮겨 지었는데, 그때에는 석문만 세우고 문루는 건축하지 않은 것을, 1976년 북악산(北岳山) 일대의 성곽을 복원하연서 문루를 짓고 숙정문(肅靖門)이란 편액을 걸었다.

흥인문은 1396년에 축조했는데, 다른 문과는 달리 옹성(甕城)을 쌓았다. 축조한 지 50여 년이 지난 1451년(문종 1)에 개건하고, 1868년(고종 5)에 개수한 것을 1958년에 보수공사를 하였다. 돈의문(서대문)은 도성 축조 때에 현재의 사직동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세운 듯한데, 1413년 풍수지리설에 따라 그 남쪽(옛 서울고등학교 서쪽)으로 옮겨 서전문(西箭門)이라 하였다가, 1422년(세종 4) 다시 그 남쪽(현 서대문 마루턱)에 이건(移建)하여 문의 이름을 도로 돈의문으로 하였다. 1711년(숙종 37) 문루를 개건하였으나,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으로 인해 철거되었다

 

  1. 명칭
     숙정문(肅靖門)은 서울 도성의 북쪽 대문으로 처음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었다. 숙정은 '북 방 의 경계를 엄하게 하여 도성 안을 평안하고 정숙하게 한다'는 뜻으로, 숙청은 '도성 북쪽의 경계를 엄하게 하여 도성 사람들이 정숙하고 맑은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한다'고 해석할 수 있어 그 뜻이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 초 성문의 이름을 붙일 때 유교 덕목인 인의 예지신(仁義禮智信) 가운데 오행(五行)에 따라 방향을 잡아 동쪽은 인(仁), 서쪽은 의(義), 남쪽은 예(禮)를 취하였으나 북쪽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북쪽인 지(智)는 18세기 초 숙종 연간에 탕춘 대성(蕩春臺城)의 성문인 '홍지문(弘智門, 일명 漢北門)'으로 보강된다. 그리고 중앙의 신(信)은 19세기 말 고종 연간에 종루의 이름을 보신각(普信閣)이라 하면서 오행이 갖추어졌다.


     숙청문(肅淸門)은 태조 5년(1396) 9월 도성의 제2차 공역이 끝나고 도성 8문이 준공되었을 때에 함께 이루어져 이름이 붙여졌으며, 속칭 북문(北門)이라 불리었다. 그런데 태조 13년 6월 풍수학생 최양선(崔揚善)이 습揚풩오 창의문과 관광방(觀光坊)의 동령(東嶺)에 있는 숙청문은 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과 다리 같으니 길을 내어 지맥을 손상시켜서는 안된다쉼 하면서 문을 막고 통행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숙청문과 창의문을 폐쇄하여 길을 막고 거기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그 후 숙청문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닫혀진 문으로 존재하게 된다. 북문이 열리는 때는 주로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행하는 시기였다. 숙청문 은 이처럼 폐쇄된 문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인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주로 북문 으로 칭하고 있으며, 중종 18년부터 숙정문(肅靖門)이라는 표현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후 로는 두 명칭이 혼용된다. 이름이 달라지기 시작 한 연유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다만 한자 표기를 달리 하여 중종 26년 북정문(北靖門)이라는 표현과 선조 20년의 숙정문(肅靜門)이라는 표현 이 있는 것과, 북문이 주로 기우(祈雨)를 위하여 열리면서 소음을 피하기 위하여 시장을 옮기고, 북 치는 것을 금지하는 것과 관련하여, 정숙한 기운을 진작시키는 의미에서 발음이 조용한 숙정문으로 바뀌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해 보게 된다.

     2. 위치와 기능
     숙정문은 종로구 삼청동 산 2-1번지 즉, 서울 도성의 북쪽에 위치한다. 북악의 산줄기에서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휴암 부엉바위, 현장 정보장교의 말에 의하면 산줄 기의 끝에 있는 바위라 하여 말(末)바위라 부른 다고 함]과 응봉(鷹峰, 성균관대학교 뒷봉 우리)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삼청터널이 있는 산언덕에서 북쪽으로 오르면 숙정문을 만나며, 삼청각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면 서울성곽과 함께 숙정문이 보인다.


     한편 연산군 10년 7월에 숙청문을 오른쪽으로 약간 옮기라고 명령한 기록이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군사상 도성 방 위와 순찰에 있어 지대가 높고 험하여 통행 하기 불편하였으므로 보다 편리한 곳으로 옮겨 지은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때는 연산 군이 폐위 1년여를 앞둔 시절로 여러 가지 방탕하고 난폭한 일을 저지르면서 성균관을 폐쇄하여 놀이터로 삼고, 그 북쪽에 있는 숙청 문도 아주 막아버리고
오른쪽으로 새 문을 만들게 한 것이다.

 

 

[더 많이 알면 더 재미있다]

 

성문 이름에도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조선은 공자의 가르침에 따른 유교(성리학)를 바탕으로 세운 나라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오륜과 오상을 중요하게 여겼다. 오륜(五倫)이란 5가지 윤리라는 뜻이고, 오상(五常)이란 변하지 않는 도(道)로 여긴 5가지를 말한다. 성문 이름에 새겨 넣은 뜻이 바로 이 오상이다.
오상은 인(仁, 어진 마음), 의(義, 옳고 바름), 예(禮, 예의), 지(智, 지혜로움), 신(信, 믿음)을 포함한다. 그래서 동쪽 대문에는 인을 넣어 흥인지문이라 하고, 남쪽 대문은 숭례문, 서쪽 대문은 돈의문, 북쪽 대문은 북정문(북청문)이라고 했다. 북정문의 ‘정’자는 ‘지’자와 통하는 글자이므로 이것은 지혜로움을 뜻한다.
그럼 하나가 남는데, 바로 ‘신’자다. 동서남북의 성문에 하나씩 넣었으니 이번에는 성 안에 있는 것에 넣었다. ‘신’자가 들어 간 건물이 무엇이 있을까? 바로 보신각이다. 여기에서 해마다 새해를 알리는 종을 친다.

서울의 성벽은 언제 허물어졌을까?
500년 동안 계속된 조선시대 내내 서울을 둘러싸고 있던 성이 처음 허물어진 것은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황제 때였다. 그때는 아직 한일병합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조약이 있은 다음이었고, 고종황제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물러난 뒤였다.
성곽을 허문 까닭은 한성전기회사가 전차가 다니는 레일을 깔기 위해서였다. 한성전기회사는 고종황제가 황실의 돈으로 만든 회사였지만, 미국이나 일본이 운영하다가 나중에 소유권까지 미국과 일본에게 넘어가고 만다. 그러므로 성곽을 허물고 도로를 내겠다는 계획은 순전히 일본의 뜻이었던 셈이다.
특히 숭례문 부근의 성곽이 대대적으로 허물어진 것은 한일 병합이 되기 3년 전인 1907년, 일본의 황태자가 대한제국을 방문하기 직전의 일이다. 일본 황태자가 좁은 숭례문을 통해 한양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는 까닭에서였다. 그래서 한 나라의 수도를 감싸고 있던 성곽을 헐고 새로 큰 길을 낸 것이다.
욱 놀라운 것은 일본인들이 ‘성벽 처리 위원회’라는 기관을 만들어 시내의 교통 중심지에 있는 모든 성벽을 부숴 없애겠다는 계획까지 세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말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의 한 장면이다.

 

서울 중구 서소문(昭義門) (주간한국 2001.12.27)

 서소문(西小門: 昭義門)은 옛날 서울 도성의 서남쪽 즉 숭례문(남대문)과 돈의문(서대문)사이에 자리했던 작은 문이었다. 조선조 태조 5년(1396년) 도성이 축조될 때 함께 지어져 소덕문(昭德門)이라 불렀다.

그러나 성종 3년(1472년)에 예종의 왕비 장순왕후(章順王后) 한(韓)씨에게 휘인소덕(徽仁昭德)이란 시호를 올렸기에 그 ‘소덕’을 피하여 ‘소의’로 고쳤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는 사이 중간에 문루가 없어졌다가 영조 19년(1743년)에 다시 제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1914년 12월, 일제가 무슨 도시 계획을 한답시고 털어 없애버렸으니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서소문동과 서소문로가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좀더 관심을 가지고 숭례문에서 서북쪽 건물사이를 비집고 능선길 뒷골목을 따라 옛 명지대와 배재학교 자리, 그리고 정동교회-이화여고쪽으로 이어지는 성터를 어림잡으면 서소문 자리를 가늠할 수 있다.

문은 성벽과 길이 만나는 곳에 짓게 마련. 옛 서울의 지도를 보면 소의문은 분명히 남별궁(南別宮 : 圓丘檀 :오늘날 웨스턴 조선호텔)쪽에서 서쪽으로 나아가는 길에 자리하고 있다.

서소문동 120번지 일대에는 생사당(生祠當 : 宣武祠)이라 하여 선조 31년(1598년)에 임진왜란때 명의 원병으로 와서 공훈이 많은 명나라 장수 형개(邢价)와 양호(楊鎬)를 기리는 선무사가 있기도 하였다.

이 선무사는 두 장수 모두살아있는 사람을 기리는 사당이라는 뜻으로 ‘생사당’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 임진왜란 뒤 선혜청(宣惠廳)의 새 창고를 설치, 새창고가 있었던 마을이라하여 새창골(新倉洞ㆍ司倉洞)이라는 땅이름이 오늘날 신창동. 그래서 서소문을 나서면 무악재 골짜기에서 흘러오는 개울이 있었다.

그 개울 위로 다리가 놓여 있었으니 헌다리(이橋)요, 그 다리를 건너 큰고개(大峴)를 넘어 양화나루(楊花津)로 이어졌다.

한강의 수운이 살아있는 시절에는 사람과 물산의 통행이 꽤나 많은 길이었다. 마포의 새우젓배, 소금배가 득실거렸는가 하면, 용산나루에서 만초내(曼草川: 旭川)를 따라 1인용의 작은 쪽배(片船)들이짐을 싣고 새창골까지 와닿았다고 하니, 꿈 같은 시절의 이야기다.

서소문밖 하천가에 소금을 쌓아 두었다가 그만 소금이 녹아내리는 바람에 염천(鹽川)이 되기 일쑤였다. 그 흔적이 오늘날 ‘염천교(鹽川橋:서울역 북쪽)’다.

한말에는 서소문동 120번지 일대에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의 병영이 있었고, 56번지에는 시위 보병 제2연대 제1대대의 병영막사가 있었다.

그런데 순종 융희 원년(1907년) 8월 1일 8시를 기해 대대장 참령 박성환(朴性煥)이 일본의 강권에 의한 조선 군대 해산을 반대, 권총으로 자결하자 이를 본 군인들이 들고 일어나 일본군과 교전, 일인병사 4명을 죽이고 31명에게 부상을 입힌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일제는 도시계획을 통해 서울의 옛스런 모습을 싹 바꾸려 했지만 이 길은 ‘서소문로’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살아있다.

서소문로가 아현동쪽으로 나아가다가 중앙일보사 조금 못미쳐서 고가도로가 시작되는 곳에 도성과 만나게 되어 있었다.

그런 그 곳에 바로 ‘소의문:서소문’자리. 소의문은 비록 역사의 뒤안질로 사라졌지만 땅이름이 ‘서소문동’이요. 길이 ‘서소문로’이니, ‘소의(昭義)’의 ‘의(義)’자 탓일까!


출처 :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글쓴이 : 무심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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