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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화성으로 간 사나이

무아. 2010. 3. 13. 09:27
어제 화성 용주사와 융, 건릉을 보고 왔습니다.
정조가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신라 사찰 갈양사라는 터에 다시 크게 지었다는 용주사는
한창 이곳 저곳 망치질 중이라 늦가을의 고즈넉한 운치를 맛보기 어려웠습니다.
그 뚝딱거리는 공사 와중에도 수능 기도를 하겠다고 모여든 학부모들이
대웅보전과 천보루 위에서 조아리며 기도하는 모습은
묘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에구, 자식이 뭐길래 저리도 성환지...
게다가 국보인 범종은 무슨 경내의 박물관으로 옮겨져 있었는데
이 곳마저 공사중이라 얼씬도 못하게 해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내심 기대하고 갔건만 좀 서운하더군요.
행랑채 옆에 정조가 직접 심었다는 회양나무(천연기념물)만이
그 옛날의 슬픈 역사를 아는 듯 모르는 듯
벌써 온몸 가득 짚단으로 만반의 월동준비를 하고 서서
탐방객을 반기고 있었습니다.


융, 건릉을 거닐며 그나마 가을의 정취를 만끽했습니다.
낙엽들이 발밑에서 사각사각 부서지는 소리...
시몬! 뭐 그렇게 시작하는 시가 생각나더군요.
융릉은 장조(사도세자)와 경의왕후를 합장한 곳이고.
건릉은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한 곳입니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효성스러운 왕을 꼽으라면 단연 정조일지 모릅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운과 대비되어 후대에 더 그렇게 보여지는 건지 알 수 없지만요.
오래 전부터 사극의 단골 소재라 누구나 알다시피
사도세자는 28세의 꽃 같은 나이에 뒤주에 갇혀 생죽음을 당합니다.
아버지 영조에 의해 당쟁의 희생양으로요.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세도세자의 온전한 복권을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하죠.
그건 곧 자신이 반역자의 대열에서 벗어나는 노력이기도 하였겠죠.
결국 영조의 눈을 어둡게 했던, 세자를 비운의 왕자로 몰고 간 당쟁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해 화성 천도를 꿈꾸는 등
역사에 길이 남을 혁혁한 업적을 남깁니다.


어쨌거나 가족끼리, 연인끼리 조용히 다녀올 만한 곳입니다.
한데, 화성 곳곳에 붙여 있는 실종자 전단은
이상하게 사람을 섬뜩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출처 : 민애청 그때 그사람
글쓴이 : 무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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